1. 84만 원의 월급과 깨어나지 않는 나의 첫 환자
84만 원. 국가고시를 패스하고 받아 든 나의 첫 노동의 대가였다. 누군가는 비웃을지 모를 그 숫자가 그때의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인격을 무시당하는 선배들의 질타와 일주일에 여섯 번씩 이어지는 살인적인 스터디 속에서, 나는 매일 아침 병원 문을 열 용기를 엄마가 감겨준 머리카락의 온기에서 빌려왔다.
재활병원 작업치료실은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경계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이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나의 첫 환자는 40대 여성분이었다. 뇌 손상으로 인해 의식이 희미한 '세미 코마(Semi-coma)' 상태였던 그녀의 곁은 늘 친언니가 지키고 있었다.
"선생님, 우리 동생 손가락이 움직인 것 같아요. 그렇죠?"
언니의 간절한 물음에 1년 차 햇병아리였던 나는 확신 대신 기도를 담아 대답했다. 84만 원이라는 초라한 월급보다 나를 더 괴롭혔던 건, 아무리 정성을 다해 관절을 풀고 자극을 주어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그녀를 마주하는 무력감이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면 그 언니의 마지막 희망줄마저 끊어질 것만 같아, 나는 매일 그녀의 굳은 손을 잡고 말을 걸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아요. 이제 그만 일어나서 같이 산책 가요."
퇴사하는 날까지 그녀는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기적 같은 재활 성공 신화는 나의 첫 페이지에 기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치료 도중 그녀가 보여주던 찰나의 미소, 그 희미한 표정 변화 하나에 언니와 나는 바보처럼 기뻐하며 울컥하곤 했다. 비록 사회로 돌려보내지는 못했지만, 그 미세한 반응 하나를 이끌어내기 위해 쏟았던 나의 진심은 84만 원의 월급으로는 결코 환산할 수 없는 '치료사'로서의 첫 마음가짐이 되었다.
나의 환자가 내 가족처럼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절실함. 깨어나지 않는 환자의 곁에서 보낸 그 막막했던 시간들이 역설적으로 나를 단단한 치료사로 성장시켰다. 엄마가 나를 위해 성벽이 되어주었듯, 나 역시 누군가의 멈춰버린 시간 곁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