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쏟아질 것 같은 언덕 위, 삐걱거리는 대문의 성 밖 세상
여덟 살, 나의 견고했던 성은 소리도 없이 허물어졌다. 할아버지의 부재는 단순히 한 사람의 빈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와 비단잉어가 살던 정원, 그리고 나를 공주로 받들어주던 세계 전체의 소멸이었다.
이삿짐 트럭이 멈춰 선 곳은 부산 북구 구포 3동의 어느 가파른 산동네였다.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 나는 경악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괴한 각도의 오르막길. 길가에 아슬아슬하게 주차된 차들은 당장이라도 굴러 떨어져 나를 덮칠 것만 같았고, 머리 위로 빽빽하게 솟은 낡은 건물들은 나를 향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송도의 평온한 바닷가와는 전혀 다른, 거칠고 가파른 세상의 민낯이었다.
"엄마, 여기서 어떻게 살아?"
철없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엄마의 굳게 다문 입술을 보며 차마 내뱉지 못했다. 우리가 도착한 새집은 이층 집이 아니었다. 손때 묻은 낡은 열쇠를 구멍에 넣고 한참을 씨름하며 돌려야 겨우 열리던 문, 열 때마다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던 삐걱거리는 철제 대문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 문 안쪽에는 양옆으로 정체 모를 아저씨들이 사는 좁디좁은 단칸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귀찌를 하던 나의 화장대 대신, 낯선 이들의 삶이 엉겨 붙은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공주가 살던 성은 사라지고, 나는 이제 매일 아침 종아리에 알이 배길 정도로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려야 하는 달동네 아이가 되었다. 이삿짐 박스 사이로 비쳐 보이던 나의 공주 옷들은 이 낡은 방 안에서 갈 곳을 잃은 채 생경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쏟아질 것 같은 그 언덕 위에서, 엄마가 얼마나 위태롭게 우리 남매를 지탱하고 있었는지. 삐걱거리는 대문 너머로 들려오는 옆방 아저씨들의 소음을 막아내며, 엄마는 이 좁은 방 한 칸을 우리의 새로운 성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삶을 깎아내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그저 무섭고 싫기만 했던 그 산동네 집이, 사실은 벼랑 끝에 선 우리 가족을 엄마가 온몸으로 받아낸 마지막 보루였다는 것을, 서른다섯의 나는 이제야 눈물을 삼키며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