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들의 아우성, 여주 고달사지
불교는 오묘하다.
깨달음과 번뇌의 중간쯤에서 중생은 신음하는데
자꾸 해탈하고 자꾸 하심(下心 )내려놓으라 한다.
석씨 성의 그분께서 보리수 아래서 득도하고
포교하고 열반에 드신 후 제자들이 모였다.
1차 집결이라 불렀는데 그때는 불경도 책도 없으니
모여서 똘똘한 경기고 출신같은 아난존자에게 물었다.
그때 부처님이 모라 하셨지?
아난왈 “내가 들었는데......”
불경이 여시아문如是我聞 으로 시작되는 이유이다
이때 모여서 말씀을 정리한 것을 경장經藏 이라 한다
그리고 헤어진 이들이 다시 모였다.
그때 탁발로 밥을 얻어먹고 다니는 데,
밥 대신에 돈으로 주면 받아야되나 안되나?
이런 이야기로 계율에 관한 논의를 한다.
그리고 이때 모여서 정리한 것을 율장律藏 이라 한다
그리고 헤어진 이들이 다시 모였다.
이번엔 공부도 많이 하고 각자 깨달음도 많았나보다.
그때 부처님이 말씀하신 의미는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아니야 이런 의미일꺼야
이렇게 논쟁하며 정리한 것을 논장論藏이라 한다
경장 율장 논장 이 셋을 모아 삼장(三藏)이라 하니
이에 통달한 이는 삼장법사 일게다 ^^
그런데 2, 3차 집결을 보면 무엇인가 일방적인 배움에서 벗어나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차이로 부터 불교의 파벌이 생기기 시작하여
고달사지는 그 연장선 안에 있다.
이러한 논쟁에서 출발하여
흔히 대승불교와 상좌부 불교로 크게 나뉜다.
소승불교란 표현은 상좌부불교로 대치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좌부 불교에서 달마의 선 사상, 참선이 출발한다.
상좌부는 아라한을 이루고 이를 통해 불법을 전도 받는다
기독교의 사도교회 같은 성격이라고나 할까?
즉 스승과 그를 잇는 제자의 대를 잇는 과정이 중요하다.
당시 인도 왕족의 일원인 달마가 인도를 떠나 동쪽으로 왔을때 달마가 깨달음을 얻는 선의 과정은 힘들었다.
좌선하고 수행할 때의 가장 큰 문제는 쏟아지는 잠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은 눈꺼풀이다. 쏟아지는 잠에 쓰러지는 눈꺼풀에 달마는 면도칼로 자신의 눈꺼풀을 잘라냈다. 달마의 그림의 눈부분이 뭉툭한 이유이다.
눈꺼풀이 떨어지며 찻잎이 되었다한다.
그래서 차를 마시기 시작한다. 사실 잠을 깨려고 마시기 시작했는데 오래하다보니 먼가 그럴싸한 표현괴 의례가 필요했다. 다도, 처음부터 거창하게 츨발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달마를 찾아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는 이가 혜가였다.
배우고 싶다면 그냥 가르쳐줄 일이지 달마는 까다로왔다.
하긴 스스로 눈꺼풀을 자른 달마대사 아니던가?
저 흰 눈이 붉게 변한다면 제자로 받아주마, 혜가는 즉시 자신의 한팔을 잘랐고 붉은 피가 흰 눈밭을 붉게 물들였다.
어쩔 수 없이 달마의 제자는 혜가가 되었다.
한 팔을 잃은 혜가, 달마는 소림사에 자리 잡았으니
옛 무협영화를 본 이들은 기억이 난다.
다른 스님들은 합장을 하는 데 소림사 승려들은 한팔로만 인사를 한다.
한팔을 잃은 혜가 때문이고, 달마의 잘못이다.
깨달음을 위해 눈꺼풀을 자르고, 팔을 자르다니
신체발부수지부모의 유교와 충돌하는 부분이다.
달마는 수련을 목적으로한 권법을 소림에서 펼쳤다고도 한다.
달마- 혜가 - 승찬 - 도신 - 홍인 - 혜능 까지
이들을 선종 6조사라한다.
달마에서 홍인까지는 거칠었다. 이 거친 선종을 다듬은 이가 혜능이니 선종은 실제로 혜능에게서 정착 완성되었다.
이 혜능의 뒤를 이어 마조도일/석두희천까지 선종 특히
조사선은 당나라때 번창했고, 이때 많은 신라의 유학승들이 선종을 배워 신라말기에 들여왔다.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있다! 이 혁신의 종파는 신라에 도착했으나 정착은 녹록치 않았다.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논리는 지방 호족들에겐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표어로 다가왔다.
당연히 신라의 성골 지배층에겐 불손한 사상이 아닐 수 없다. 공식적으로 선종을 들여온 초기 멤버인 도의선사는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편 그의 제자들에겐 스승인 도의선사 역시 부처급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부처의 무덤이 탑이니 당연히 스승인 도의선사가 입적하니 부처에 해당하는 탑이 필요했다.
승탑은 우리 역사에 이렇게 등장했다.
그러나 탑을 만들어도 석가모니의 탑과 똑같이 하기엔
부담이 있었나보다. 아무래도 부처와 동급은 아니었을테니까, 그래서 최초의 승탑은 다소 어정쩡한 스타일로 등장했다. 그러나 기단부-탑신부-지붕돌 등은 갖추었다.
양양 도의선사 승탑
그리고 이후 안정화된 디자인을 거쳐
신라말기에 아름다운 승탑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동리산문 태안사 승탑
이렇게 신라에 들어온 선종은 점차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선종의 전파와 승탑이라는 불교미술은 함께 발전해간다.
이런 관점에서 고달사지를 방문하다면 그 빈터가 조금은 쉽고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초기에 난항을 겪었던 선종은 왕실과 협력하여
신라말기에 자리를 잡게된다. 그리고 이른바 9산선문이라는 큰 개창시기를 맞이한다.
남원 실상사 실상선문을 시작으로
곡성 태안사 동리산문 장흥 보림사 가지산문
문경 봉암사 희양산문 보령 성주사 성주산문
영월 흥녕사 사자산문 강릉 굴산사 사굴산문
해주 광조사 수미산문 그리고
창원 봉림사 봉림산문 인데 이 봉림산문의 츨발지가
바로 고달사 이디.
고달사지의 공식 등장은 신라 경문왕때이다.
경문왕은 누구인가?
임금님귀는 당나귀 귀의 그 주인공이다.
귀가 길어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했건만
신라말기는 지방 호족들의 성장과 중앙정부의 갈등이
지속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바로 여주 지역을 중심으로 김범문의 난이 있기도 했다
김범문은 경주에서 왕위계승을 하려다 불어난 물을 건너지 못해 왕이 못된 김주원의 손자이다.
김주원은 명주, 지금의 강릉으로 물러났고
그 아들 김헌창이 공주에서 난을 일으키고 죽었다.
그 김헌창의 아들이 김범문이다.
난은 진압했으나 지역 민심을 달래야했다.
경문왕은 고승 현욱을 이 지역에 파견했으니
고달사의 현욱이 개창조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현욱은 실상선원에서 이미 인정받은 고승으로 여주 혜목산 고달사로 옮겨와 자리잡고 활동한다.
이때의 대표적인 제자가 심희이다. 그러나 이미 신라말기에 호족세력이 강성해지는데, 이 지역은 양길(훗날 그 부하인 궁예가 실권을 잡는다) 의 세력권으로 양길의 압박이 심해지자, 심희는 창원으로 내려가 봉림산문을 개창한다. 고달사지가 혜목산문, 또는 봉림산문이라 불리는 이유이다.
중앙박물관 마당의 봉림사 진경대사 탑비
이 심희의 제자가 홍준, 충담, 찬유인데 고려의 건국과 함께 왕건의 지원을 받아 홍준은 개경으로, 충담은 흥법사로, 그리고 찬유는 고달사로 옮겨온다. 아마도 왕권의 지방세력에 대한 견제와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흥법사지 승탑
그래서 오늘날 고달사지에는 현욱과 찬유의 흔적이 남게되고,
고려 광종때 고달사는 부동사원(옮기지않는 절대 사원)으로 도봉원, 희양원과 함께 지정받는다.
이 시기가 아마도 고달사의 전성기 이고, 이러한 전성기의 흔적이 석불대좌, 찬유의 탑비, 그리고 현욱과 찬유의 것으로 추정되는 승탑이 존재하게 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