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워다 키우고 있는 칼라(calla)이다. 2021년 가을이었으니 올해로 세 해째 함께 살고 있다. 첫 해는 개화기가 한참 지난 뒤라 꽃을 보지 못했고, 두 번째 해는 관리 부실로 꽃을 보지 못했다. 나의 일신이 고달프다는 이유로 아이가 햇빛을 굶어 웃자라도 흘려보고 벌레에게 뜯겨도 말로만 걱정했다. 깊이 반성하고 올해는 성심껏 보살폈더니 드디어 꽃을 피웠다. 노란 색이었군. 예쁘네.
반가운 꽃이 새벽 잠을 멀리 쫓았다. 편하게 앉아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온 고 황현산 선생님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를 펼쳤다.평범한 일상의 단어들로 연결된 문장이 유연하고 잔잔한 물결이 되어 흘러 간다. 저자의 깊은 사색이 고요한 파동에 실려 내 머리를 지나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수식이 없는 소박한 문장에는 생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저자의 곡진한 마음과 나로서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삶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었다. 알맹이 없는 말을 지우고 나면 마침표만 남는 나의 글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처럼 느껴졌다.
엄경희(2011)에서, "언어의 깊이는 상상의 깊이며 생각이 깊이다. 고뇌가 없는 얕은 생각은 얕은 언어로 표현된다.-중략- 눈물을 강요하는 가을 시편은 얼마나 흔한가. 자폐적 나르시시즘에 도취한 비탄의 문장들은 얼마나 진부한가."라는 내용을 읽었을 때, 부끄러워 온몸이 따끔거렸다. 벽 보고 앉아 혼자 쓰고 지우는 시이지만 영 그른 것 같아 그만 쓸까 고민도 했다.
10년 넘은 나의 메모,[엄경희(2011), 시, 새움 출판사]에서 발췌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광기인지 잘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일어선다. 더 늙기 전에 이런 훌륭한 글을 만났다는 것이 내게는 행운이며 아직은 피안을 꿈 꿀 여력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묘한 흥분에 몸이 가벼워졌다. 내친김에 냉큼 엎드려 며칠 까먹고 패스했던 기도를 했다.
'이만하면 괜찮습니다. 나는 잘 살고 있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식구들이 일어나기 전에 아침밥을 했다. 우리의 허기를 채우고 마음을 다독여 줄 귀리밥이 고슬고슬하게 잘 지어졌다. 여전히 미성숙의 궤도를 달리는 나의 생이, 그리고 나의 글이 이 밥처럼 구수하게 익어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