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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Jun 21. 2023

시 읽기의 어려움

어제 시를 읽었다. 까막눈이 아니므로 글자가 술술 잘 읽힌다마는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궁리를 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면 그렇다 치고 넘기면서 떠듬떠듬 읽어 내려가는데, 처음에는 두어 행 간격으로 돌발하던 '그렇다 치고'가 로 갈수록 줄줄이사탕이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소리 내서 다시 여러 번 읽어도 기대만큼 나아지지 않았다. 지성으로 일군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지만, 인과관계로 이어진 두 개의 문장이 각각 표상하는 바를 연결하여 해석할 논리가 내게는 없었다. 더 좁게는 그 주어에 그 서술어를 고르게 한 물성의 해석도 이해하지 못하니 주제를 어찌 파악할고. 분명 읽었음에도 내용을 알 수 없어 답답하고 이렇게까지 모를 일인가 약이 올랐다.


이 천박한 세상에 '시 하나쯤은 고상해도 된다'는 어떤 평론가의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너무 어려워 손이 닿지 않는 저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를 만나면 이것을 읽고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 정말 있을까, 영혼을 고양하는 미적 체험을 하는 사람이 정말 있을까 싶다. 물론 어려움과 고상함을 등치시키는 것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하는 나의 아둔함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황현산(2018)은 "시인이 제 몸을 상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든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엊그제 적어둔 메모를 다시 읽으며,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하려는 의욕이 강박처럼 작용하면 시인도 독자도 혼돈에 빠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열이 올라 구시렁거리며 반복해 시를 읽는 나를 보고 큰조카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너도 들어보렴, 내가 큰 소리로 읽어주니 저는 무슨 뜻인지 알겠다네. 우울증 약을 먹는 제 입장에서 보면 이건 우울한 심정을 쓴 거라며, 구멍이 숭숭 뚫린 나름의 해석을 길게 피력했다.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해서 가치없는 글이라 하면 안 된다며 따끔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아오, 잘난 지지배. 밴댕이 소갈머리의 귀에는 거슬렸지만, 좌우지간 틀린 말은 아니니 마음에 담아두었다.



가벼운 빗소리에 잠이 깼다. 비에 젖어 서늘한 새벽 바람이 좋다. 밤새 나를 기다린 작은 목숨들에게 물을 주면서, 푸념 삼아 쓴 나의 시 나부랭이를 생각했다. 나는 그것들이 '시'이기를 바라지만 진짜가 되려면 갈 길이 멀다.

왼쪽의 수태 위에는 2mm 크기의 틸란드시아들이 살고있다. 하찮아서가 아니라 정말 작아서 작은 목숨들이다.




* 황현산(2018), 밤이 선생이다, 영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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