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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Jun 22. 2023

하수구 참외라니. 오빠, 달려!

사는 이야기

지난 19일 월요일, 욕실 하수구 구멍 밖으로 하얗고 가느다란 무언가가 삐죽 튀어나것을 발견, 플라스틱 조각이겠거니 하고 치워 없애려 잡아당기는데 난데없이 기다란 몸이 쑤욱 달려 올라왔다. 혀.....혈마...... 새싹??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욕실 하수구 구멍에서 돋은 새싹

안구테러의 위험이 있는 하수구 사진을 그림으로 대체했다. 지저분한 현실이 깨끗하게 편집, 재해석 되어 맘 편히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이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니 그 점은 녀석에게 좀 미안하다.



새싹을 발견하기에는 너무나 의외의 장소라 내 눈으로 보면서도 긴가민가. 머리카락과 개털로 휘감긴 채 끌려나온 뿌리를 보고야 녀석의 정체를 알아챘다. 추측컨데, 씨앗이 식구들 중 누군가의 발바닥에 묻어 욕실로 옮겨진 뒤에, 물에 쓸려 냄새가 올라오는 것을 막기 한 하수구의 장치 안으로 흘러들어간 모양이다. 지저분한 것들을 떼내고 자세히 봤다. 참외 싹이다. 잔뿌리도 제법 나왔다. 빛을 못 보고 물만 먹어, 하릴없이 길기만 한다.

화장실 하수구에서 태어난  참외의 싹

최소한의 조건만 충족되어도 두려움 없이 태어나는 생명들, 너나 나나 다를 게 없구나. 넌들 네가 그런 곳에서 어나 배를 주리 연명하다 쓰봉장 당할 줄 알았겠나. 눈코입 없는 나의 반쪽 생명도 빛의 세계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헤엄칠 때는 내가 도달할 빛의 세계가 두려움과 절망의 집일 줄은 몰랐다.  



살려고 이렇게까지 애쓴 것이 애처로워서 흙에 심기로 했다. 남은 개털을 더 제거하면 잔뿌리도 잘릴 것 같아서 그냥 그대로 두었다. 아파 베란다의 화분 속이 네가 살기에 아주 좋은 곳은 아니다만 하수구 보다는 나을 거다.


하수구에서 싹튼 참외 새싹 심기




집에 있던 흙을 마지막으로 탈탈 털어 심어줬다. 일조량이 부족해 결실하기는 힘들어도, 잘 먹고 잘 살라고 계란 껍질 말려 간 것을 듬뿍 넣어줬다. 넌 똥 참외가 아니라 하수구 참외구나. 참 별일을 다 본다. 이왕 이리 된 거 잘 살아보자. 꽃이 피지 않으면 어떠냐, 자식이 없으면 어떠냐. 주어진 만큼은 살아보자. 나도 이러구러 얇고 길게 걍 살고 있다. 때때로 심하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살 만하다.

흙에 심은 참외의 새싹



흙에 심고 사흘째,

어쩜 이리 비가 시원하게 오시나요. 어이구야, 욘석 보게나. 태양을 향해 떡잎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엉뚱한 곳으로 굴러가 잠시 욕된 시간을 보냈지만 이정도면 신수가 훤하다.

참외 오빠, 달려!!!

하수구에서 싹이 터 자란 참외 유묘




* 쓰봉장: 식집사(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식물들 처리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쓰레기 봉투에 넣어 장례를 치르다... 이런 정도의 의미라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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