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도 인력(引力)이 있다. '이파리'하고 소리를 내면 바람에 몸을 부비며 서걱이는 푸르고 자잘한 나뭇잎들이 떠오른다. 자그맣고 매끄러운 잎의 모양과 질감, 그것이 불러오는 정서 혹은 기억들이 시공을 넘어 내게 밀려 온다. 볕 좋은 오후, 매일 한 뼘씩 가속이 붙는 노화에 나무토막이 돼가는 팔다리를 펴며 기지개를 켠다. 우두둑거리는 관절에 통증이 들어와 박힌다. "아이고, 아버지......" 소리가 절로 난다.
'아버지', 그래 내 아버지, 21 년 전에 잔디 덮고 누워 지금은 흙이 되어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사람, 흥이 있고 아름다움을 알고 영민해서 웬만한 것은 홀로 습득해 아는 것도 재주도 많았던 사람.
얼결에 불려온 아버지가 젊디 젊다. 늦은 귀가로 피곤한 그가 사역처럼 내게 배당된, 다음 날 우리 반 수업에 쓰일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나는 밥상 위에 도화지를 펴고 달력에 인쇄된 어느 화가의 풍경화를 크레파스로 모사하는 그의 옆에 앉아 있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비벼가며 자지 않고 버티는 중이다. 일거리를 가져왔다고 화를 낼까봐 조마조마하고 한편으로는 포근하기도 하다. 불안과 행복이 뒤섞인 그 밤은 여덟 살인 내게 길고도 짧았다.
올리브그린과 그레이, 옐로우오크가 조화로웠던 아버지의 그림이 나는 좋았다. 우울하면서도 아늑한 색감이 위태롭고 서늘했던 그 날의 기쁨과 닮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그의 그림을 기억해 따라 그리면서 소실점 속으로 사라지는 길 위를 서성이거나 길섶에 줄 지어선 나무 아래 우두커니 서있고는 했다.
그는 다른 장르의 창작에서도 재능을 발휘했다. 행위예술에 가깝다고 해야할까. 작품에 쓰이는 오브제는 다양하고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그의 창작혼은 대체로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찾아 왔는데, 접신이 되면 가장 먼저 밥상이 빛보다 빠르게 벽을 향해 날아갔다. 궤도를 이탈한 접시들이 몸을 비틀다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그것들은 정갈하게 품고 있던 반찬을 벽에 부리고 사금파리가 되어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작품의 대미는 중력 방향으로 흘러내리는 김치와 콩나물, 멸치 등과 벽지에 만발한 장미꽃의 콜라보로 완성됐다. 죽은 채 모욕 당한 생명과 살아본 적 없는 아름다움의 비명 앞에서 아지랑이가 소리없이 흔렸다.
불똥이 엄마에게로 옮겨가면 나는 깨진 그릇과 한데 뒤섞인 반찬을 치우고 방바닥과 벽을 물걸레로 닦았다. 직관이 부족한 어린 나에게 그의 광기어린 퍼포먼스는 혼돈이고 공포였다. 무섭고 혐오스러운 상황이 수습돼도 그 뒤로 생이 이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새하얘진 나는 점점 투명해졌고 어느 날부터는 내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사라지고 지워졌다.
그래도 모든 것이 흘러갔다. 슬픔도 기쁨도 한 자리에 있지 않고 흥이 다하면 사라져 갔다. 상처는 새로운 상처를 만들며 끊임없이 고통의 파문을 일으키지만 우리를 괴롭히던 절망의 심연을 들여다 보게도 했다. '나'를 찾는 것은 나의 인연과보를 바로 보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일을 찾는 거라 깨달을 즈음 나는 아버지를 이해했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어린 아지랑이들 앞에서 벽을 타고 내리던 것은 그가 부르는 절망의 서사시였다. 날을 세우고 나의 주머니 속에 숨어 인생 자체 종결을 벼르며 실행의 날을 기다리던 짱돌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언제고 그것으로 내 운명의 목구멍을 틀어막으리라 마음 먹고 있었다. 나의 짱돌은 한 방이고 그의 광기는 무수한 잽이었다. 그것만이 달랐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수용했지만 나는 그가 그립지 않다. 다만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결핍과 막막함으로 쪼그라든 그의 일생을 위로하지 못한 것은 인간적으로 미안하다. 냉냉하게 그를 보내고 나서전쟁 통에 홀몸 되어 고군분투했을 열두 살의 사내아이가 바로 보였다. 모진 시간을 견뎌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었지만 어린 딸들에게는 악몽이었던 아비로서의 그의 지난 날이 안타까웠다.
나도 그다지 훌륭한 딸은 아니었다고 그러니 퉁치는 걸로 하자고 말하고 싶어도 이제는 그럴 수 없다. 가끔은 그와 나 사이의 결연한 단절이 나를 힘들게 하지만 절벽 앞에 선 듯한 답답함이 어리석음의 과보라면 그것 역시 달게 받아야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