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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 Oct 28. 2024

그 때는 그랬다

사는 이야기

몇 해  무덥던 8월의 어느

아파트 마당에 쌓인 폐휴지 더미에서

책을 서너 권 주웠다 

그 중의 하나를 골라 표지를 열었다 독자를

사로잡아 사뿐히 그들의 품에 안기고픈 책의

소망이 책날개 위에 작은 활자로 반짝인다

인한 정신과 명석함

표지에서 입증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가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현실과 당당하게 마주'하여 성공을

이루었다는 이야기, 그런 그녀 좌충우돌

세계여행을 하며 은 것을 적은 기록이라네

그러니 얼마나 멋지겠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비뚤어진 독자

자폭의 버튼을 밟고 서서 움쭉달싹 못하

나의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까만 비닐

구두 속에서 자라지 못한 나의 시간이 문득

가엾어졌다 조그만 신발에 갇혀 제자리에

채로 말라붙은 허약한 꿈을 어루만져 보았다

미적지근한 온기가 아직 남아있다

발가락이 뒤로 접 번데기처럼 옹송크린

희망을 흔들어 보고 싶어졌다 바로 서기 힘들면

무릎걸음이라도 어보라 말해 볼까

나는 불화의 기억으로 허리가 꺾인 하프 늙은이

엉겨볼 만한 공통점이 그녀에게 있다면

대단하다 호기롭게 칭찬이라도 해보련만

배신에 넌더리난 오기를 제아무리 추스려도

대단한 그녀들을 흉내낼 수 없을 거라는 체념에

이르자 울고 싶어졌다

그 날 나는 반백이 되고도 꾸역꾸역 올라오는

원망부끄러워 하지 않았 로서는

쩔 수 없는 남루한 선택지가 나를 절벽 아래로

밀었 억울해 하며 조용히 입을 닫았다

오래 묵어 너덜너덜해진 절망을 파고들며

진액이 말라버린 나의 상처를 핥고 또 핥았다

삭정이 끝에 간당이던 용서와 화해가 바람에

뜯겨 날아가고 나는 이전보다 강렬해진 불행한

결말에 기어코 마침표찍고 싶었다

하지만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가는 일은 나의

의지를 넘어서는 간절함 그리고 뭉클함

덧없이 흘러간 시간의 봉분 위로 부스스

생의 의지가 다시 일어섰다 혼자 추던

난리부르스를 멈추고 부둥켜 안고 있던  

자기연민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내가 보

나 역시 누군가에게 피할 수 없는 쁜 선택

이었그들에게 상처를 남긴

악몽이었음 깨닫는다 불행이 불행을 낳는

인연의 과보가 서로에게 불가항력인 것을

내 목에 걸린 것이 홀로 대단하다 여겼다

난 언제나 불행 배틀에서의 일인자는 나라고

우겼다

숨막히는 무더위 가운데서 가깟으로 넘겼던

파란 하나를 떠올리며 글을 썼다. 그 때도 그

난리굿이 깨달음의 마지막 버전일 거라

기대했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배반의 쿠폰북에

도장을 하나 추가했을 뿐이다.

아보니 그 때는 그랬다.



 

바람이 일 때마다 물결 위에 흔들리는 빛의 조각들 흔들리고 부서지고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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