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 1주차 여영추 <콘클라베>
*<콘클라베>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 문단에 별도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에서 예외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리고 예외를 발견했을 때 그 예외를 경계하고 배척하거나 그동안 가져왔던 확신을 철회하게 되죠. 그리고 이러한 확신은 경계가 존재한다는 착각에서 오고는 합니다. 경계가 존재한다는 착각은 경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배제하거나 경계에서 벗어나기를 강요합니다. 현시대에서 흑백논리는 경계해야 한다고 여겨지지만, 대부분은 사회 사이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믿음은 의심하지 않고 살아가죠. 오늘 이야기할 영화, 에드워드 버거(Edward Berger, 1970~) 감독의 <콘클라베(Conclave)>(2024)는 우리의 확신을 의심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콘클라베>는 교황의 죽음 이후, 새로운 교황 선출을 위해 추기경들이 한 자리에 모여 ‘콘클라베’를 진행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그 과정에서 콘클라베의 단장을 맡은 토머스 로런스 추기경(이하 토머스)은 유력한 교황 후보들의 숨겨진 스캔들을 파헤치게 되죠. 이러한 과정에서 토머스는 믿음과 불신, 확신과 의심 사이에서 헤매다, 베니테즈 추기경의 비밀을 알게 되고 확신하지 않음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대체 이 영화가 왜 ‘여영추(여성학 관점에서 보는 영화 추천)’에 소개되는지 의아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독도 남자, 주연도 남자, 조연도 거의 전부 다 남자이며, 남자들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확신과 의심’은 비단 종교와 신에 대한 믿음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영화의 엔딩에 다다르면, 관객 또한 현실에서 확신했던 것들을 의심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 끝에서 우리가 의심하며 살지 않았던 것들의 경계에 관한 고민을 하게 만듭니다.
퀴어 페미니즘 이론으로 유명한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1956년도~, 미국)는 자신의 저서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2008)에서 ‘섹스(생물학적 성)는 언제나 이미 젠더(사회문화적 성)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섹스와 젠더의 구별이란 규제적 상상물에 불과하며 이를 해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해당 저서에서 남성과 여성의 경계란 뚜렷하지 않으며 우리는 젠더를 수행하며 살아간다는 젠더 수행성 이론을 내세웠습니다. 이번 여영추에서는 이러한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바탕으로 <콘클라베>를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관객은 콘클라베에 모인 모든 추기경들은 남성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채로 영화를 보게 됩니다. 실제로 가톨릭교에서 여성은 사제직을 맡을 수 없으며, 가톨릭법에도 남성만이 교황으로 선출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교황은 라틴어로 Papa(Pope)라고 불리며, 이는 ‘아버지’를 의미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죠. 즉, 남성이 교황이 되는 것은 사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며 관객 또한 이에 의문을 가지지 않은 채로 영화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콘클라베>는 영화 내내 추기경들의 스캔들과 수녀의 존재를 통해 이에 대한 의문을 조금씩 던집니다. 이러한 의문은 엔딩에서 베니테즈 추기경이 남성의 성기를 지닌 동시에 자궁과 난소를 가진 인터섹스(intersex, 간성)임이 밝혀지며 남성만이 교황으로 선출되는 것에 대한 질문에서 ‘남성과 여성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까지 확장됩니다. 이러한 엔딩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영화에서 내내 이야기하던 확신과 의심이 관객에게까지 강력하게 다가오는 경험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 관객은 추기경들이 모두 남성일 것이라고 전제한 후 영화를 보게 됩니다. 심지어 토머스가 확신하는 것이 가장 두려운 죄라고 연설할 때에도, 토머스가 그러했듯 관객 또한 추기경은 모두 남성일 것이라고 확신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교황으로 선출된 베르테즈가 인터섹스였음이 밝혀지고, 여성과 남성 사이에 경계가 존재한다는 확신에 베니테즈라는 캐릭터를 통해 의심이라는 균열을 냅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과도 연결되죠. 영화는 이를 통해 2시간 내내 이끌어 왔던 주제를 확장시키고, 존재하는지조차 의심하지 않았던 확신으로부터 관객을 해방시키며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 줍니다.
경계에 대한 의문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성과 남성의 경계에 대한 질문은 자연히 ‘여성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여성 영화란 보통 여성 감독이나 여성 주연, 여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콘클라베>는 감독이 남성이며, 주요 캐릭터 또한 아그네스 수녀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처럼 보이며 여성 인권에 대한 주제를 강력하게 담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성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그네스 수녀를 통해 가톨릭교에서 배제되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벨리니 추기경과 트랑블레, 아데예미 추기경을 통해 가톨릭 내 다양성 포용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베르테즈 추기경을 통해 젠더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까지 확장시키며 퀴어 페미니즘과 연관시켰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콘클라베>는 여성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사실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은 페미니즘에서도 문제적으로 받아들여지고는 합니다.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이 여성의 범주를 해체하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이것이 역설적으로 ‘페미니즘’이 존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콘클라베>를 여성 영화로 받아들였을 때에도 이러한 문제점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여성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왔던 여성 영화들과는 전혀 다르기에, 여성 영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혼란을 야기하고 여성 영화 자체를 부정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콘클라베>가 ‘여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여성학 관점에서 바라볼 여지는 충분합니다. 또한 점점 영화계에서 여성 스태프와 여성 캐릭터의 입지가 넓어지고 있는 만큼(물론 아직 많은 문제가 남아 있지만요.), 여성 영화의 범주에 대한 논의 또한 활발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콘클라베>가 던진 질문이 이러한 논의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