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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숨 Apr 11. 2022

나는 임영웅에게 효도를 미뤘다

임영웅 콘서트 피(血)켓팅 실패담

[일상(日常)의 인상(印象)] 스쳐 지나가는 일상 속에서, 생각할 거리가 있는 순간을 기록합니다.



★정보★
오늘 저녁 효도 콘서트 티켓팅이 있습니다~
효도하실 분들 참고하세요♥


  지난 목요일(4월 7일) 오후 4시경 부서 톡방에 이런 글이 툭 올라왔다. 후배 하나가 부서 사진 한 장과 함께 올린 것이다. 사진을 눌러보'임영웅 콘서트(IM HERO) - 고양'이라고 쓰여 있다. 날짜는 5월 6일부터 8일까지였다.


  엥? 5월 8일? 


  그렇다. 그날은 어버이날이다. 무릎을 탁 쳤다. 경영의 달인 잭 웰치(1935~2020)가 울고 갈 만한 신박한 마케팅 전략이다.


  어버이날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다. 그런데 기념일 주인공이 자기 선물을 직접 사는 경우는 없다. 그러니까 이 콘서트 티켓의 '타깃'은 우리 같은 '자식(욕 아니고 아들+딸)'들이다. 콘서트 소개 페이지 어디에도 '효도'의 'ㅎ'자도 쓰여 있지 않지만 이 콘서트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효도 상품'이다.


임영웅 콘서트 소식을 들은 '자식'들


  난 '미스터 트롯'이라는 프로그램을, 다 합쳐서 채 1분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어르신들께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다.


  미스터 트롯이 막 끝난 2020년 3월의 어느 날, 어머니를 모시고 어디론가 운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 엄마는 원래 연예인에 별 관심이 없다. 문득 '이런 우리 엄마도 임영웅을 좋아할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임영웅의 노래 '바램(표준어는 '바람')'을 슬쩍 한번 틀어봤다.


  어머니는 "임영웅이가 참 대단한 애야"라고 곧바로 운을 떼시더니 미스터 트롯에서 그의 활약, 그가 살아온 길, 그의 길었던 무명 생활, 그의 모친이 운영하는 포천의 미용실 등등 임영웅에 대한 모든 것을 내게 말씀해주셨다. 마치 '임영웅 다큐'를 한 편 본 기분이었다. 장모님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한번 핸드폰에 임영웅 노래를 넣어드렸더니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그런 중년 여인 2명이 임영웅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열쇠는 내가 쥐고 있었다.



'임영웅 피켓팅'에 도전하다


  티켓 판매는 오후 8시부터다. 아내와 나는 계획을 세웠다. 1인당 2매만 예약할 수 있다고 하니 나는 우리 부모님 티켓(5/6 금요일)을, 아내는 처가 어른들의 티켓(5/7 토요일)을 맡기로 했다. 각자 맡은 요일에서 실패할 경우 일요일로 즉각 목표를 바꾸기로 했다.


  아내는 퇴근길 도로 한복판에서 티켓을 예매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7시 반에 업무가 끝났는데도 회사에 머물며 자발적 야근을 선택했다. 나는 예전에 함께 일했던 K형과 무려 2년 만에 만나고 있었는데, 시선은 계속 핸드폰을 향하고 있었다.


  마침내 8시 정각. 빛의 속도로 예매 버튼을 눌러댔지만 곧바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예매 대기 중"이라는 문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미칠 듯한 새로고침의 유혹ㅠㅠ


  중앙 블록, 그것도 앞자리를 보란 듯이 예매해서 "어머니(장모님) 제가 해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전화를 걸겠다던 나의 포부는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이미 로얄석은 '예매 대기 중'이라는 저 창 너머로 소멸되어 가는 중일 게다. 아내 상황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아내에게 "망한 듯"이라는 카톡이 왔다.


  다급해진 나는 내 앞에 있던 K형의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K형은 고맙게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내 꺼도 써. 우리 부모님은 콘서트 별로 안 좋아하셔" K형 입장에서도, 2년 만의 대화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선 우리 둘 사이에 놓인 이 '장애물'을 얼른 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옛 핸드폰의 데이터를 새 핸드폰에 옮기듯 나는 폰 두 개를 나란히 앞에 두고 번갈아 쳐다봤다. 폰의 성능 차이인지, 5분이나 더 늦게 대기를 시작한 K형 폰의 예매 창이 먼저 열렸다. 


  하지만 새로운 희망고문이 시작됐다. 무슨 두더지 잡기도 아니고.. 빈 좌석을 눌러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할 때마다 '다른 고객이 구매하고 있는 자리'라고 떴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마침내 모든 좌석이 매진됐다. 피 터지는 티켓팅을 '피켓팅'이라고 한다는데 실제로 해본 건 처음이었다. 허무했다. '효도' 콘서트를 예매하지 못했으니 난 '불효자'인 게 분명했다.


분명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부모님께 어버이날 선물을 드려본 게 언제더라?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는 손수건 부자, 어머니는 스카프 부자였다. 대부분 형과 내가 사드린 것이었다. 90년대 어린이의 용돈으로 감당할 수 있는 어버이날 선물의 최대 예산은 한 분당 1만 원씩이었다. 집 근처 백화점 1층에서 팔던 D사 손수건, P사 스카프가 내가 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물이었다.


  그나마도 예산에 들어맞는 제품은 '세일 폭이 아주 큰' 한두 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그 한두 개를 참 열심히도 저울질했다. '이 손수건은 작년 사드린 거랑 색깔이 너무 비슷해', '이 스카프는 지나치게 흐물흐물해'라면서 말이다. 내가 어른이 되어 돈을 벌면 백화점 1층이 아니라 더 높은 층에서, 손수건이나 스카프보다 훨씬 더 좋은 선물을 사드리겠노라고 다짐하곤 했다. 


  물론 결과는 항상 성공이었다. 엄마 아빠는 선물 상자를 열어볼 때마다 항상 함박웃음을 지어주셨다.(지금 생각하면 상자만 봐도 충분히 '작년과 똑같은 선물'임을 예상할 수 있었을 텐데 실망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비슷비슷한 손수건을 매년 사드렸지만 아버지는 늘 기뻐하셨다


  하지만 정작 내가 돈을 벌기 시작한 대학생 이후, 나는 더 이상 정성껏 선물을 고르지 않았다. '돈'을 버느라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그냥 '돈'을 선물로 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내 마음속에서는 항상 A와 B의 싸움이 일어난다


A "이번에도 돈으로 드리려고? 너무 성의가 없잖아?"
B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는데 직접 사시는 게 가장 좋아"


  나는 항상 B의 손을 들어줬고 그 세월이 벌써 20년이다. 임영웅 콘서트 티켓은 내가 A에게 내밀 수 있는 '편리한' 반론인 셈이다. 예전 손수건, 스카프를 살 때처럼 성심성의껏 고른 선물은 아니지만, 적어도 돈으로만 때우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부모님이 바라는 '효도'란?


  그럼 우리 엄마에겐 '임영웅 콘서트 예매에 성공한 아들'이 가장 효자일까? 우리 부모님이 가장 원하는 효도가 그런 것일까?


  그런데 그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몇 번 힌트를 주셨기 때문이다. 가끔 형네 가족, 우리 내외와 함께 식사를 할 때 우리가 "뭐 드시고 싶으세요?"라고 여쭈면 아버지는 이렇게 답하시곤 했다.


아무 거나 먹자. 너네 얼굴 보는 게 중요하지 뭐


  그런가 하면 작년 여름에는 엄마가 어느 때보다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하신 적이 있었다. "홈쇼핑에서 터키 여행 상품이 나왔는데 일단 8장(부모님+형네 가족 4명+우리 내외=8명) 예약을 했어". 코로나 때문에 안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한껏 상기됐던 음성이 금세 풀 죽은 목소리로 바뀌어버렸다.


  우리 어머니는 5년 전 베트남 다낭과 4년 전 충북 제천 얘기를 아직도 하신다. 두 곳 다 우리 가족이 다 함께 여행을 갔던 장소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뭘 먹는지, 어딜 가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했던 것이다.


이때 입은 가족 티를 안 꺼내 입은 지 3년이 넘었다


  나는 이번 임영웅 피켓팅 사건으로 진짜 효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한동안 '돈'에게 미뤘던 효도를, 이제는 '임영웅'에게 미루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말이다.


  그래서 이번 어버이날에는 진짜 선물을 한 번 준비해보기로 했다. 요즘은 포장만 뜯지 않으면 반품도 잘 되지 않는가. 아주 오랜만에 엄마, 아빠가 좋아하실만한 선물을 직접 골라볼 계획이다.


  그리고 부모님께 추억을 선물해드릴 수 있는 '가족 여행'도 4년 만에 한 번 계획해보려고 한다. 결혼하고 내게는 부모님이 두 분 더 생겼으니 총 네 분께 해당하는 다짐이다.


  물론 나는 오는 4월 13일 오후 8시에 임영웅 콘서트 취소 티켓을 줍줍 하기 위해 또 한 번 '피켓팅'에 나설 것이다.(어쩐지 말도 안 되게 빨리 매진됐다 했는데, 부정 티켓이 다수 적발됐다고 한다.) 하지만 클릭을 하는 마음가짐은 며칠 전과 좀 다를 것 같다.


  효도는 임영웅이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상의 인상> 첫 화부터 보기 https://brunch.co.kr/@a1f9702194b543e/14

<오늘도 아내를 바늘로 찔렀다(부제: 난임부부 생존기)> 읽기 https://brunch.co.kr/brunchbook/sadneed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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