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저울
죄의식은 죄로 인한 무게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속박에 의한다는 것을 자야가 깨달았을 때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죄의 무게 또한 저마다의 마음속 저울에 따라 다르다는 것도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에 대해 말이나 행동은 반대로 표현하거나, 상대의 행동을 반대로 해석해서 스스로를 위로 삼는다는 것도 말이다.
연이은 동네 초상에 동네 사람들은 덩달아 바빠졌다. 연로하신 어르신이 있는 집에선 상을 치르기 위해 미리들 콩나물이나 숙주나물을 기르고 있었는데, 미쳐 키워내지 못한 콩나물과 숙주나물은 뽑혀 나왔다. 자야 이모는 동네 초상을 위한 품앗이 콩나물에 마지막 물을 주기 위해 길러온 물을 한 바가지 떠 올리는데도 생각 따로 손 따로였다.
자야는 질퍽 거리는 하얀 고무신에 미끄러져 갸우뚱 거리는 이모 손에서 물바가지를 받아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었다. 이모는 말 한마디 없이 그저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밤 새 자야를 찾으러 온 동네 어디를 헤집고 다녔는지 자야를 바라보는 눈은 허공에서 아직도 자야를 찾고 있는 것인지, 자야를 찾으러 나갔다가 누구를 찾으러 나갔는지 몰라 멍하고 있는 듯 넋이 나가 있었다.
이른 아침 논에 물길을 잡고 돌아온 이모부는 자야를 보자마자 밤새 걱정했던 것만큼 커다란 손으로 자야의 머리를 후려쳤다. 정지 아궁이 옆으로 내동댕이 쳐진 자야를 바라보는 이모의 눈은 정신을 차리는 듯하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런 이모의 눈에는 상엿집에서 자고 들어온 자야가 더 자유해 보였다.
시부의 등에 떠밀려 재가한 이모, 그녀가 데려온 아들딸 남매는 서울로 갔다. 그리고 이 남자, 선진 농업인으로 농사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고 힘이 장사였으며 잠은 언제 자는지도 모를 정도로 늘 깨어 있는 이모부에게서 아들딸을 낳았고 쉴 새 없이 일만 하고 있었던 이모는 어느 순간부터 가끔씩 멍하니 먼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는 “그랑께 미쳐서 나갔제, 나도 언제 미칠지 모르겄따”라며 혼잣말을 했다.
비가 오려고 날씨가 흐릿해지면 가끔 이모네 집 주변을 도는 미친년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이모부는 물사례를 했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이모부 죽은 첫째 마누라에게서 본 아들이라는 오빠가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자야는 이모 말에 따라 아래채 방을 치웠다.
그들은 밤이고 낮이고 방에서 나오질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방을 향해 이모부는 “저 년놈들은 언제까지 짐승마냥 붙어 있을꺼여!”하며 소리를 질렀다. 여러 날이 지나고 이모는 그들에게 동네에서도 떨어진 마지막 집 작은 방을 얻어 내 보냈다. 그리고 잊힐만하는데, 그 오빠가 나타나 함께 왔던 서울 여자를 찾아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는데 꼭 짐승 같았다. 이모부는 그 오빠를 아귀다툼 끝에 방에 가두고 밖에서 방문을 잠갔다. 방 안에서는 한 동안 짐승의 울부짖음으로 온 동네가 시끄러웠다. 자야는 밥때만 되면 작은 상을 차려 아래채 방 문 앞에 놓고 튀듯이 도망쳐 나왔다.
그날도 여느 날과 같이 자야는 아래채에서 밥상을 거두려는데 잠가졌다고 생각한 방 안에 있던 그 오빠가 자야를 잡아채더니 “내 돈 내놔야, 이 년이 도둑년이어야, 너 오늘 죽어봐라” 하면서 한 발길질에 자야가 어떻게 방어할 새도 없이 폭력이 가해졌다. 차라리 숨이라도 쉴 수 있으면 일어나기라도, 말이라도 하건만 명치를 발길질로 채인 자야는 번데기마냥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그때 자야는 그 오빠 눈에서 세모난 불빛이 나오고 있는 것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