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 했던 사람들

나는 그들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있었다.

by 서연담



-버티는 쪽에 서는 사람


어떤 관계는 조용히, 자연스럽게 사그라드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관계는 그렇게 매끄럽지 않다.

누군가는 붙잡고, 누군가는 버티고, 누군가는 서서히 무너진다.


나는 늘 ‘버티는 쪽’에 서 있었다.

무언가를 유지하려고 끝까지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 결과, 나 자신의 가장 여린 부분이 점점 깎여나갔다.


‘관계’라는 이름으로 지속된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지키는 법을 잊어갔다.


감정적으로 불균형한 관계에 오래 머물면, 피로가 몸속에 축적된다.

침묵은 점점 무거워지고, 말하지 못한 마음들은 안쪽에서 곪는다.

나를 위한 감정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상대방의 요구와 감정만이 자리를 차지한다.


나는 그 상태로 오랜 시간을 지냈다.

정작 나 자신은 점점 텅 비어갔는데,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침묵 속에 곪아가는 마음


한때 아주 가까웠던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연애 문제, 가족 문제, 사회생활 속 갈등으로 늘 힘들어했지만,

스스로 그것을 정리할 힘은 없었다.


대신 그 부담을 누군가에게 풀어내야 했고,

그 누군가는 나였다.


새벽에도 전화가 왔고,

긴 문자 메시지로 그녀의 감정이 매일같이 전달됐다.

나는 처음엔 진심으로 도왔다.

진심으로 안타까워했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 시기는 나 또한 버거운 상황이었다.

나 역시 외롭고 고달팠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내 상태를 물은 적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 이야기를 꺼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나의 힘듦보다 자기감정을 쏟아내는 데 급급했다.

나는 말이 줄었고, 고개만 끄덕이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언어는 점점 마르고, 마음은 조용히 지쳐갔다.


‘이건 우정이 아니다. 이건 의존이다.’라는 자각이 천천히 찾아왔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내 안에서는 이미 수많은 경고등이 켜져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어른들과의 관계도 무너져 내렸다.

그들은 나를 ‘예뻐한다’며 따뜻하게 다가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관계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들에게 나는 감정을 털어놓기 좋은, 조용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들어주는 역할에 익숙한 나는 그들의 고통과 외로움을 묵묵히 들어주었고,

때로는 부모의 역할까지 감당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일방적이었다.

나는 ‘가족 같은’ 존재가 아니라, ‘정서 쓰레기통’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억울했는지,

누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는지를 말했지만,

나의 슬픔과 분노, 나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감정을 감당하는 사람


나는 늘 듣는 사람이었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다.

어떤 관계는 그 역할이 고정되는 순간, 다시 균형을 회복할 수 없게 된다.

결국 나는 나 자신의 감정을 포기하게 되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착함이라고 착각했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오해했다.




-관계의 균열을 자각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는 공감한 것이 아니라 참은 것이었다.

그들과의 관계는 나를 성장시키기는커녕,

내 감정의 뿌리를 잘라냈다.


그래서 나는 떠났다.

관계가 싫어서가 아니라, 더는 그 관계 안에서 나로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용한 멀어짐은 신호였다


그들은 왜 그렇게 조용히 멀어졌느냐고 물었지만,

사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침묵 속에서 신호를 보냈다.

조용히 멀어진 것이 아니라, 수없이 참고 견디다가 조용해진 것이다.


그 침묵은 방어였고, 보호였으며, 생존이었다.


떠난 후에야 나는 비로소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의 감정을 ‘나눴던’ 것이 아니라, ‘감당하고’ 있었음을.

그건 우정도, 사랑도 아니었다.

단지 일방적인 감정 소비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떠난 나 자신을 용서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모든 관계가 완전히 대등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누군가가 더 주기도 하고, 더 기대기도 한다.

하지만 최소한, 서로를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나를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경계를 무시했고,

나의 침묵을 이용했으며,

나의 고갈을 모른 척했다.


그래서 떠났다.


그리고 이제는 확신한다.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가장 옳은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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