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석사과정을 졸업한 저는 여러차례 박물관 취업을 위해 지원서를 넣었습니다. 미술사를 전공한 자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미술사라는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직장이 박물관(미술관)을 제외하면 딱히 없기도 하거니와, 연구에 욕심이 있다면 학예사 신분으로 여러가지 혜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교수님과 대학원 선배들이 모두 권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박물관의 문턱은 높았습니다. 인지도가 높은 국공립박물관은 서류부터 탈락되기 일쑤였고, 면접을 보러 오라는 곳은 교통편이 여의치 않은 지역 박물관들 뿐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산간 오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런 곳조차 수십명의 면접 대기자들이 있었습니다. 끝없는 탈락의 고배를 마시자 심적으로,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통이 매우 불편한 예천박물관. 버스조차 없어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면접장에 갔습니다.
박물관 취업을 준비할 경우 일반 기업체와는 달리 인터넷 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상당히 제한적입니다. 그러므로 면접을 준비하려면 반드시 사전 방문이 필수입니다. 게다가 면접장에서 반드시 물어보는 질문 중 하나는 "저희 박물관 전시를 둘러보니 어떻습니까?" 입니다. 전시장 내 개선할 점을 묻는 것이죠. 사전 방문이 없다면 면접에서 딱히 할 말도 없습니다. 이런 지원자는 보나마나 탈락입니다.
사찰 성보박물관이나 농어촌 지역 공립박물관처럼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은 수도권에서 너무나 멀기에 가는데만 꼬박 한나절이 걸립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현지에서 숙박을 하기도 합니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박물관 취업을 준비는 상당한 비용이 소모됩니다. 천신만고 끝에 취업이 되더라도 숙소가 제공되는 것은 아니기에 일하는 동안 지낼 거주지도 알아보아야 하고, 출퇴근용 자동차도 구매해야 합니다.
급여가 많은 것도 아니며(중소기업 초봉과 비교해도 열악한 수준), 저처럼 경력이 없는 지원자는 기간제 근로자(1년미만)나 단기 인턴 등으로 근무하며 최소 3년의 경력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정3급 학예사로 인정받을 수 있게됩니다. 그나마 운이 좋으면 공무직(무기계약직)으로 근무하며 3년 경력을 쌓기도 하는데, 그 역시 정규직 학예사에 비하면 처우가 열악한 편입니다. 그렇다고 정규직 학예사가 받는 급여가 많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박물관 큐레이터는 부자집 자제들만 하는 직업이라는 자조섞인 농담이 있을 정도죠.
학예사는 정장을 멋지게 입고 작품을 설명하는 직업으로 오인되곤 하는데, 작품 설명은 학예사가 업무 중 극히 일부입니다. 이마저도 이벤트 성이 강하죠. (사진 : 위키백과)
취업에 대하여 구구절절 할 말은 많지만, 이정도에서 그치겠습니다. 학예사 되기가 본문의 주제도 아닐 뿐더러,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고 취업이 된 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가 한동안 방황했던 배경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거 같아 다소 장황한 내용을 풀어봤습니다.
궁궐해설사가 되기로 결심하다
저는 예전부터 문화유산 해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비록 꿈은 미술사 연구자이지만, 해설을 통해 학계의 연구 성과를 국민들과 공유하는 일도 중요하다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있어야 국민들이 문화유산의 보존과 연구에 관심을 갖게되며, 국가 및 사회로부터의 지원을 확대할 수 있는 명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전부터 저서와 강연 등을 통해 활발한 소통을 추구해온 국립중앙박물관 유홍준 관장. 학자 출신으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몇 안되는 인물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상 당장의 쓸모를 입증하지 못하면 무가치한 것으로 인식되기 쉽습니다. 작금의 인문학이 위기에 봉착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문학계는 국민과 활발한 소통을 추구하며 자신의 쓸모를 입증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가장 무난한 접근 방법이 문화유산 해설이나 강연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학계는 인문학 연구의 필요성을 홍보ㆍ역설하고, 사회는 이를 인식하여 지원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학계와 시민사회가 따로 노는 듯한 모양새여서 다소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학계의 연구는 대학 교수나 소수의 연구소 및 기관에 소속된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이들의 성과는 시민들과 잘 공유되지 못합니다. 심지어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소통을 무의미한 행위로 인식하기도 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시민들 역시 그들의 지적 욕구를 여행사의 가이드 투어나 유튜브 영상 등으로 해소하는 형편입니다. 이런 현상 자체가 부정적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돈이 결부되어 있는 탓에 인문학이 흥미 위주의 콘텐츠로 변질되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방송사들도 시청률 때문인지 전공자보다는 인지도가 높은 일타 강사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편성하곤 하는데, 이러다보니 일부 왜곡된 내용이 유통되고 있음도 느낍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인문학 전공자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생각됩니다.
문화유산 해설사들은 대부분 자원봉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전공을 하지 않은 평범한 시민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돈벌이와 관련없는 자원봉사이므로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분야의 공부를 하는 등 내적 성장의 기회도 되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박물관 소속 도슨트나 일부 시민단체 소속으로 활동하면 학계 연구자들로부터 교육도 받을 수도 있으니 나름 전문성도 갖출 수 있죠. 2024년까지는 박물관 취업 준비로 엄두를 못냈지만, 기왕 이렇게 된 이상 한번 도전해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문화유산 해설 봉사를 할 수 있는 길은 크게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스스로 인원을 모집하여 해설을 한다.
이 방법은 유명 작가이거나 인플루언서가 아닌 이상 매우 어렵습니다.
둘째, 박물관 소속 도슨트로 활동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많은 국공립박물관은 자체적으로 문화유산 해설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해설사 모집 시 지원하여 합격하면 박물관 학예사들이 제공하는 교육을 받고 정해진 시간에 해설 봉사를 하는 방식입니다.
셋째, 시민단체 소속으로 궁궐이나 왕릉에서 활동한다.
서울에 한정되지만, 궁궐(+종묘)과 왕릉을 해설하는 시민단체가 두 곳 있습니다. 궁궐지킴이와 궁궐길라잡이입니다. 두 단체의 신규 해설사 모집 공고에 지원하여 합격하면, 일정 비용을 지불한 뒤 (교수 및)연구자들로부터 기초적인 교육을 제공받으며 이후 해설 실습을 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수료하게되면 궁궐에서 해설사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궁궐지킴이는 매주 토요일, 궁궐길라잡이는 매주 일요일 정해진 시간에 궁궐 및 왕릉에서 무료로 해설을 합니다. 둘 다 시민단체이기 때문에 해설사로 활동하려면 매달 소정의 회비를 내야합니다.
궁궐길라잡이 활동
저는 작년 1월 궁궐길라잡이에 지원하여 합격했고, 모든 교육과정을 수료하여 현재는 경희궁에서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궁궐길라잡이에서 해설을 하게 되면서 얻게된 장점이 몇가지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작년 국가유산청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궁궐길라잡이 모집 공고
첫째, 해설을 위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이전부터 미술사나 고건축 등을 공부하긴 하였으나 저의 관심사인 불교미술에 편중된 감이 없지않아 있었습니다. 궁궐 해설을 하려면 당연히 궁궐을 잘 알아야하니 공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덕분에 불교미술에 쏠려있던 저의 지식과 시야가 한층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둘째, 관심사가 비슷한 이들과 교류하게 됩니다. 제가 사회생활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이나 사적으로 친한 지인들 모두 문화유산으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전통 문화라는 소재가 굉장히 특수한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한 대화를 나누려면 어느정도 기본적인 식견이 있어야 하는데, 먹고살기 바쁜 서민들 입장에서 이를 공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최근 전시 관람 열풍이 분다지만, 유행이 시작된지 얼마 안된만큼 오랜 대화를 나눌 정도로 깊이있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런 점에서 궁궐길라잡이 활동은 저와 관심사가 비슷한 이들을 만나는 하나의 창구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셋째, 단체 내에서 전통 문화나 역사 등 폭넓은 인문학 관련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해설의 대상이 되는 궁궐이나 왕릉 외에도 관련성이 있는 제반 분야의 강연이 제공됩니다. 매년 한차례 지방의 문화유산 답사를 다녀오기도 합니다. 소정의 비용과 1박 2일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야하는 부담은 있지만,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으로서는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 외에도 각 궁궐마다 소규모로 스터디를 하고 있습니다. 공통의 교재를 선정하여 같이 연구하거나 특정 분야에 조예가 깊은 1인이 강연하는 방식 등 자율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과제와 방향
빛이 있다면 그림자도 있는 법. 지난 1년간 경희궁에서 궁궐길라잡이로 활동하면서 몇가지 어려움도 느꼈습니다.
첫번째, 경희궁 자체의 문제.
조선왕조의 궁궐 전반이 그런편이나, 경희궁의 훼손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경희궁을 찾은 관람객은 숭정문과 숭정전, 자정전과 태령전 정도를 보게 됩니다. 그 외에도 정문인 흥화문과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놓인 금천교가 남아있으나 주요 동선과 멀리 떨어진 탓에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입니다. 볼만한 장소가 대여섯군데 남짓에 불과하므로 다른 궁궐 대비 관람객들의 흥미를 자극할만한 유인이 부족합니다. 이는 경희궁을 찾는 시민들이 타 궁 대비 적은 이유입니다. 하지만 경희궁의 전각이 몇안되는 점과 그에 따른 관심 부족은 개인적인 차원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 부분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지난 1월 11일 촬영한 경희궁 사진. 안 그래도 적은 방문객이 이날 한파로 인하여 급감했습니다.
두번째, 저 자신의 심리적인 문제.
해설을 하다보면 듣다가 중간에 이탈하는 관람객들을 보게 됩니다. 저의 해설이 재미없었거나, 지루했거나, 어렵다고 느꼈기 때문일겁니다. 사람들마다 생각과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법이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은 편치가 않습니다.
작년 여름 경희궁을 방문하신 시민들 앞에서 해설하는 모습.
한때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서 제가 재미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는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영상 한편에 들이는 노력 대비 조회수가 무척이나 저조했기 때문입니다. 궁궐 해설에서도 저의 특성이 발현(?)되는 것 같아 다소 씁쓸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다른 분들의 해설을 참관하는데, 그래도 어렵습니다.
극복 방향
대략 이 두가지가 저의 궁궐길라잡이 활동을 어렵게 하는 요인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는 무언가를 할때 항상 일정한 기대치를 갖고 있으며 막상 결과가 그에 못미치면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 유튜브를 포기한 이유가 마음이 괴로웠기 때문이었는데, 궁궐 해설도 작게나마 이런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궁궐길라잡이 활동을 오래 지속하려면 마음을 잘 다스리는 법을 익혀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관람객들의 반응에 일희일비 하는 저의 심리입니다. 이것은 저의 해설 철학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유산 해설은 보통 흥미와 깊이(내용)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야하는데, 너무 어려워도 안되지만 지나치게 재미 위주로 가도 곤란합니다. 하지만 둘 중 어디에 무게 중심을 둔 해설을 할 것이냐는 확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희궁 태령전에서는 영조의 어진이 있는 탓에 보통 영조와 관련된 일화를 많이 해설하곤 합니다.
저의 경우는 흥미보다는 깊이에 강점이 있는 편인데, 마음 한 구석에서는 재미를 추구하는 해설을 높이 평가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관람객들이 중간에 이탈하자 괴로워했던 것이죠.
하지만 흥미위주의 내용들은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 쇼츠나 SNS 상에서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손쉬운 클릭 몇번으로 접할 수 있는 내용을 해설사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깊이에 방점을 둔 해설을 추구하되, 해설 시작시 미리 알려드릴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듣는 사람이 괴롭지 않도록 적절한 난이도 조절은 해야겠지요. 중간중간 긴장을 풀어줄 수 있는 흥미로운 콘텐츠도 지속적으로 찾아볼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