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모르게 2% 부족한 듯한 전시
12월 25일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 특별전에 다녀왔다. 원래 이날은 예수님의 생일이지만 커플들이 데이트하면서 사회에 민폐를 끼치는 날로 왜곡, 변질(?) 된 지 오래이니 24일 밤에 술을 진탕 마시고 26일 아침에 일어나라는 지인들의 권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술을 즐기지 않는지라 게임도 하고 유튜브도 보고 이런저런 소일거리로 빈둥거리다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생각해 두었던 이 전시를 보러 가기로 했다.
아마 커플들은 노느라 정신없어서 이렇게 교양을 쌓을 좋은 기회가 있어도 활용하지 못할 것이다. 연애를 안 하면 이렇게 인문학적 소양을 기를 좋은 기회가 넘쳐난다. 그런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는 커플들은 참 안쓰러운 존재들이다. 솔로인 덕분에 이런 좋은 내적 성장 기회를 활용할 수 있다. 이런 솔로들은 정말이지 축복받은 존재들이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이 줄줄 흐른다. 주체할 수가 없는 이 기쁨..... 근데 왜 눈에서 눈물이 안 멈추는 것인가....
이날이 12월 마지막 수요일이라 5000원인 입장료를 반값인 2500원으로 할인받았다. 싸게 득템 했다고 좋아했는데 28일부터 31일까지 전시장을 무료로 개방한다고 한다. 왠지 손해 본 듯한 이 느낌은 뭘까... 그리고 왜 갑자기 무료 행사를 하는지도 의문이다. 크리스마스날에 그냥 집에 있을걸 그랬나....
전시장 입구
전시 초입에 들어가면 이런 글귀가 벽면에 나타난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얼핏 들으면 조금 섬찟한 느낌도 드는데, 이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노래이다. 마을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었더니 하늘에서 황금알 6개가 내려왔다고 한다. 그 이후 알에서 잘생긴 청년 여섯 명이 태어났는데, 각각 6가야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이 기록된 삼국유사 가락국기. 전시 초기에는 삼국유사 대신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발굴된 흙방울이 전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흙방울에는 거북 등껍질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가야의 건국신화를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시가 되자 학계와 언론에서 이를 비판하는 지적이 있었고, 급기야 전시품을 교체하기에 이른다. 박물관 측에서 학계의 자문을 충분히 구하고 전시를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현 정부에서 가야사 복원을 국정과제로 내세웠는데, 그에 발맞추려다 무리수를 두었다는 언급도 나왔다. 안타깝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기사를 참조하면 된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20002.html
삼국유사 다음에 나오는 파사석탑. 김해 수로왕비릉에 있는 것인데, 이번에 전시를 하느라고 특별히 모셔왔다.
사진이 이상하게 붉게 나왔다. 이 파사석탑 전시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박물관 측에서는 김수로의 부인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설화를 소개하면서 가야의 국제성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허황옥이 인도에서 왔다는 그 내용을 믿는 학자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뭐가 아쉬워서 인도에서 그 먼 가야까지 시집을 왔을까 싶다.
파사석탑을 지나면 다양한 가야의 토기들이 나온다. 너무 많아서 이렇게 한꺼번에 전시를 해놨다. 자세히 보면 각각의 가야마다 토기 양식이 다르다. 그에 대한 설명은 아래에 나오는 안내문으로 대신하겠다.
오리 모양 토기.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단순히 무덤에 매장하려는 용도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당시 주거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집 모양 토기
여러가지 칼들. 고리가 달려 있어서 환두대도라고 한다. 철기 문화가 발달했던 가야의 철 생산기술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으나, 백제가 가야에 준 것이라고 한다. 백제와 신라는 여러 가야중에 한쪽이 커지지 못하도록 시기적절하게 견제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가야는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연맹왕국 단계에서 멸망하고 만다.
신라도 가야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신라와 가야가 서로 주고받은 칼들.
고리에 세 잎 모양이 있는 이것은 신라가 가야에게 준 것이라고 한다.
한쪽에는 이렇게 고령 지산동 44호 무덤을 발굴 당시 모습대로 꾸며놓았다.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여러 가지 금제 장식들. 예전에 리움 미술관에서 보았던 금관도 이곳에 전시되었다.
말 탄 가야무사의 모습을 상상해서 만들어 놓았다.
가야 무사의 모습이 잘 드러난 말탄무사모양 뿔잔. 국보 275호다.
가야는 철갑 옷도 만들었다. 판갑옷이 양쪽 벽에 늘어서 있는 게 마치 백화점의 쇼윈도를 연상시킨다.
덩이쇠라는 것인데, 일단 철광석을 녹여서 이렇게 만들어 놓은 다음 무기나 농기구로 가공해서 썼고, 필요할 때는 화폐로도 사용되었다.
가야는 해로를 통한 무역을 많이 하였다. 그러다보니 배 모양 토기도 상당히 많이 출토되었다. 작은 나라가 살아남으려면 농업보다는 상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가야는 바다를 끼고 있고, 중국과 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국제 무역에 유리했다.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여러가지 유물들. 초원지대에서 주로 출토되는 동복.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많이 나왔던 유리제품. 왜와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주는 파형동기. 특히 저 동복은 유목문화와 관련 있는 유물인데 어떻게 김해지방까지 온 것인지 궁금하다.
삿갓모양 말방울.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되었다는데, 안내문에 의하면 모용 선비랑 관련이 있는 유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김해 대성동 29호 무덤을 재현한 모습.
전시 마지막에는 이런 미술 작품이 설치되어 있었다. 작품 안에서 불빛이 계속 나오는 동시에 가야금으로 연주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전시 마지막에 설치된 안내문. 전시의 기획 의도인 공존에 관하여 설명하는 내용인 거 같다. 지금이야 다양성의 가치가 존중되면서 공존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중앙집권화와 통합의 가치가 우선시되었다. 그렇다면 가야가 시대를 못 읽었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왠지 모르게 공존이라는 수식어로 애써 포장하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나저나 오늘이나 내일 갔더라면 무료인데, 아쉽다.
전시를 다 보고 나오는 길에 붙어 있던 가야너비아니 홍보물. 어떤 맛일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