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늦깎이 미술사학도 May 21. 2020

불상의 탄생

동양과 서양의 문명이 만났을때

석가모니께서 세상을 뜨고 난 뒤, 그를 따르던 수많은 제자들과 재가신자들은 그가 남긴 가르침을 계승하며 세상속으로 널리 퍼뜨려 나갔다. 하지만 붓다를 신격화하여 받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인도인들은 그가 설했던 불법에 귀의한 것이지 붓다라는 신에게 귀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받들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의 모습은 그림이나, 조각으로도 표현되지 않았다.(사진1)


그런 이유로 인도의 초기 불교 유적에는 붓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붓다의 일대기를 표현한 부조를 보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나 열반 같은 여러 사건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을 암시하는 표현만 있을뿐(보리수나 사라쌍수, 법륜 등) 붓다의 모습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고대 인도인들은 성인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불경스럽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한가지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진1. 나가왕 엘라파트라의 경배, 엘라파트라가 빈대좌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있다. 빈대좌는 석가를 의미한다. 바르후트 스투파, 콜카타 인도박물관 소장



그래서 초기 불교인들은 이러한 신념을 잘 지켰다. 대표적인 불교 경전인 금강경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반영된 듯한 구절이 있다. 아래의 금강경 제 26 법신비상분을 보자.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서른 두가지 모습에서 여래를 볼 수가 있겠는가?"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32가지 모습에서 여래를 볼 수가 있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만약 32가지 모습에서 여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면 32상을 갖춘 전륜성왕도 곧 여래일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기로는, 32상으로써는 여래를 볼 수 없나이다."

이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모양으로만 여래를 보려 하거나, 

소리로만 여래를 찾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이니

그는 결코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 금강경 제26 법신비상분 -





그 모습이 아무리 그럴싸할지라도 진정한 여래(붓다)는 아니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탓인지 불멸 이후에도 한동안 불상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재가신자들은 사리가 모셔진 탑을 붓다와 동일시 여기며 신앙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런 경향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아쇼카왕의 시대에도 유지되었다.(사진2) 

사진2. 산치대탑. 무불상 시대에는 이런 탑 신앙이 성행했다. 부처의 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 기원전 4세기의 마케도니아에서는 대단한 영웅이 한명 출현한다. 바로 알렉산더 대왕(BC 356-323)이다. 그는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정복전쟁을 하는데 할애했다. 그 결과 그리스와 이집트, 페르시아 제국은 하나가 되었다(사진3). 이후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동방으로 이주해 왔고 이곳저곳에 그들의 도시를 세웠다. 이 사건은 마치 나비효과처럼 불교에도 엄청난 변화를 야기하게 되는데, 바로 불상(불화)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사진3. 알렉산더 대왕이 원정해서 넓힌 제국의 영토. 그의 동방원정은 동서양의 문화가 융합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곤 하였다. 그리스와 그 뒤를 이은 로마에서 발견된 수많은 신상들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간다라(오늘날 파키스탄 지역)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붓다를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불상이다(서기 1세기경). 이렇게 간다라 지역에서 불상이 탄생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중인도의 마투라 지역에서도 불상을 만든다. 이렇게 해서 불상이 만들어진다. (사진4)

사진4. 왼쪽은 밀로의 비너스(아프로디테) 상. 가운데가 간다라 지역 불상. 오른쪽이 마투라 지역 불상


불상의 탄생 계기는 알았는데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당시 사람들은 붓다의 모습을 본적이 없는데 어떻게 불상을 만들었을까? 과연 누구를 모델로 만든 것일까? 그 당시 간다라 지역 최고의 미남을 모델로 했을까? 위에서 예시로든 금강경을 보면 32존상이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는 위대한 성인 혹은 제왕(전륜성왕)이 가지는 신체적 특징을 의미한다. 여기에 80여가지의 특성이 더해져서 32존상 80종호의 원칙에 의해 불상이 만들어진다.당시 인도인들은 그들이 관념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전륜성왕의 이상적인 용모와 최대한 유사하게 붓다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32존상 80종호는 불상이 만들어진 이후에 덧붙여지고 윤색되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고 생각한다. 


양 지역의 불상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간다라 지역의 불상은 상대적으로 서늘한 기후 때문인지 두꺼운 가사를 걸치고 있다. 예로 든 사진에는 없지만 코밑에 수염을 조각한 불상도 많다.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상당히 심각해보인다. 사색에 잠긴 듯한 모습이다. 


 

이와 반대로 마투라 지역 불상은 옷을 입은 듯 안입은 듯한 모습이며, 상당히 밝은 표정의 청년상을 하고 있다. 표정은 상당히 밝다. 간다라 불상과는 대조적인 모습인데, 이 지역의 더운 열대기후 탓이 아닐까 싶다. 재미있게도 불상에 그 지역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 외에도 차이점이 있다면 상투를 틀고 있는 모습을 들수있다. 간다라 지역의 상투는 머리를 있는대로 끌어올려서 상투 끈으로 묶은 모습이다. 상투 끈에는 구슬이 달려 있는데, 장식용도 내지는 상투 끈을 묶을때 매듭을 짓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사진5). 나중에는 양식화가 이루어지면서 이런 상투끈과 구슬의 표현 없이도 상투가 유지되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머리에 별도의 살이 솟아 있는것 같이 표현이 되는데, 이를 육계라고 한다.

사진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인도 불상. 간다라 불상으로 보이는데 상투를 잘보면 끈으로 묶여있고 끈에는 구슬이 달려 있다.


마투라 지역의 상투를 보면 주변 머리는 전부 밀어버리고 중앙부의 머리만 상투로 삼아서 틀어올렸다. 빙빙 돌려서 틀어올렸는데 마치 꽈배기 모양 같다. 책에는 우렁상투 혹은 소라 모양의 상투라고 나와있다. 마치 우렁이의 껍질을 보는듯 하다. (사진6)

사진6. 마투라 불상의 상투를 보면 머리카락이 휘어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불교는 더욱 발전하게 되는데, 분명히 간다라와 마투라 양 지역 불자들간의 상호 교류도 활발하게 전개 되었을것이다. 훗날 굽타시대(320~550)에 이르면 이 두지역 불상의 특징이 혼합된 불상이 나타나는데 아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사진7) 

사진7. 5세기 굽타시대에 나타난 이상적인 불상. 인체가 육감적으로 묘사되었지만 천박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으며 표정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숭고한 느낌을 들게 한다.


이렇게 인도에서 처음 출현한 불상은 불교가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전해진다. 중국의 불상은 더욱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중국의 불상이 한반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중국의 불상에 관하여 다뤄보겠다.





P.S. 

불상의 탄생 이유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 말고도 기존의 부파불교와 다른 대승불교의 탄생이라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석가 당시의 불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수행자 위주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 수행자들은 대중들의 구제 보다는 본인의 깨달음을 얻는 것,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것에만 전력투구를 하게 되어 대중(재가신자)들은 점차 불교에서 소외되어 갔습니다. 이런 경향은 지속되어 승려들은 점점 형이상학적인 논리의 추구에만 매달리게 되고 불교의 교리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져 갔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이들은 붓다 생존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에서 대승불교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그래서 기존의 불교를 소승(작은수레)이라고 비판하지요. 이는 자신의 해탈만을 추구한다는 의미입니다. 대승에서 불상을 만들게 된 이유에는 이렇게 재가신자들을 위한 배려의 측면도 존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법을 깨닫는 일도 중요하지만 신자들을 위한 종교로서의 역할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 있다면 신앙심을 가지기에는 더욱 수월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려면 글 여러편을 써야 하기 때문에 그냥 이 정도만 약술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독서모임은 왜 나이제한을 두는 것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