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불교조각
문화라는 것은 발전하여 성숙하면 주변으로 퍼지는 속성이 있다. 인도에서 일어나 발전했던 불교역시 간다라를 거쳐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전파된다. 먼저 서역에서 흡수된 불교는 그 이후 중국에 도달한다. 학자들은 그 시기를 대략 서기 1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재위 57~75)가 어느날 신하들에게 말하길, 금인金人의 꿈을 꾸었는데 몸에서는 빛이 나며 허공을 날았다고 하자 신하들은 '불佛'이라는 신이 허공을 날며 몸에서 빛이 난다고 답한다. 이에 명제는 서역으로 사신을 파견하였고, 이 사신이 축법란, 가섭마등 두 스님과 함께 각종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돌아와서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를 '명제구법설'이라고 하는데 불교의 중국 전파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다. 다만 종교적인 속성 때문에 어느정도의 허구는 감안하여야 한다.
하지만 불교는 중국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중국에는 이미 토착사상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에 유행했던 도가사상은 가장 큰 경쟁상대였다. 처음에는 도가의 세가 우세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당시의 미술을 보면 부처는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일개 신선 정도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를 격의불교시대라고 부른다. 중국인들은 불교를 올바로 보지 못하고 그들 멋대로 바라본 것이다. 초기에 승려들이 불교의 교의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 도가의 개념을 빌려와 설명하다보니 이렇게 되었을 것이라 보는 견해도 있고, 한나라 시기에는 나라가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궂이 외래종교인 불교에 큰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 보는 의견도 있다. 이 당시에 만들어진 불교미술을 불교미술이 아니라 불교적인 요소로 파악해야 한다고 지적한 학자들이 있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이 불수경을 보면 여러가지 번잡한 형상과 함께 불좌상이 보인다(사진1). 얼핏봐도 불교적인 도상은 아니고 여러가지 신비한 형상이 같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도교적인 요소가 물씬 풍긴다.
시간이 흘러 후한이 망하고 위촉오의 삼국시대를 지나 서진시기가 되면 서역에서 더 많은 승려들이 들어오게 되고 불교도 그 세를 넓혀가게 된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인 5호 16국 시대가 되면서 불교는 더 많은 힘을 얻게 된다. 기존의 유가나 도가사상으로는 이러한 혼란한 상황을 타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불상도 더이상 도교적인 요소가 아닌 예배의 대상으로서 제 구실을 하게 되었다.
하버드 대학교의 아서 색클러 박물관에는 중국의 금동불좌상이 한점 있는데, 간다라의 불상과 같은 용모를 하고 있다(사진1-1). 얼굴은 서구적이며 콧수염이 나있고 선정인을 하고 있다. 어깨와 팔뒤로 광배의 흔적이 있는데 파손된 모양이다. 직사각형 형태의 대좌에는 중간에 연꽃으로 보이는 꽃이 화병에서 나오고 있고 양 옆으로는 사자가 표현되어 있는데 사자를 본적이 없어서 그런지 어색하다. 300년 경의 조각이라는데, 전반적으로 인도의 불상을 흉내내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이 보살상 역시 색클러 박물관 소장 불상과 마찬가지로 인도의 불상을 흉내내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사진1-2). 용모도 그렇고 샌들 형태의 신발 역시 그러하다. 불보살상의 조각이 어색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적어도 이시기까지는 불교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사진 1-3에 보이는 금동불좌상은 위의 불보살상과 조금 다르다. 일단 얼굴이 중국인과 비슷해졌다. 상투를 한 머리는 나발이 아니고 직발이지만 많이 자연스러워졌고 옷주름도 비교적 차분하게 잘 정리되었다. 손 모양을 보면 선정인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해가 부족한 듯 양손을 단전에 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것도 도교에서 하는 수행의 한가지 형태다. 아직까지 도교식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경향이 남아있다는 것을 이 상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황제와 귀족들의 후원이 많아지고 구마라집 같은 고승들이 훌륭하게 불경을 번역해 내면서 불교조각 역시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그 모습은 다음 글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