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조각과 석굴
서기 220년에 후한이 망하고 이후의 중국은 극도의 혼란기를 맞이한다. 위, 촉, 오 삼국으로 쪼개져서 치열하게 싸우던 삼국시대는 서기 280년 사마염이 세운 진에 의해 종식되었다. 하지만 진의 황제들은 무능했고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다. 진은 결국 북방 이민족인 흉노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 왕족인 사마예가 강남에서 나라를 다시 세웠으나, 화북지역은 이민족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양자강 이남은 한족이 차지하고, 이북은 기마민족의 지배를 받는 구도가 형성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남북조시대라고 한다. 앞선 삼국시대까지 합하면 위진남북조시대라고 부른다. 화북지역에서는 흉노를 포함한 다섯 이민족이 쳐들어와 나라를 세우고 망하기를 반복하였기에 5호 16국 시대라는 표현도 쓴다. 이 시기는 여러 왕조가 생겨나서 통일을 위한 전쟁이 빈번하였으며, 정치력이 낮아 짧은 기간에 여러나라가 흥망을 반복하였다. 사회가 안정되지 못하고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이런 어지러움은 581년 수가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야 종식되었다.
혼란스러웠던 시기인 만큼 유교보다는 도교가 성행하였고, 외래 종교인 불교도 이 시기에 급성장을 하였다. 혼란한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은 불안정한 현세의 영화보다는 내세의 구원을 추구하게 되었고, 극락왕생을 말하는 불교는 이에 적합했다. 그러므로 이 시기 불교의 발전은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화북의 유목민 출신 지배층들은 한족의 사상인 도교보다는 외래 사상인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는 것이 더 유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지배층에게서 많은 후원을 받게 된다.
지난 글에서 중국인의 모습으로 표현된 불상이 등장하였음을 말하였다. 이후 불교는 계속 발전하여, 석굴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불교미술을 도입하게 된다. 석굴이란 절벽을 파서 굴을 만들고 그 내부를 절과 같이 꾸며서 예배나 수행의 공간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굴을 파서 만든 사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중국에서는 4세기경 돈황과 양주 주변에서 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하였다. 5호 16국 시대에 조성된 대표적인 석굴은 돈황 막고굴과 영정의 병령사 석굴이 있다.
막고굴은 명사산의 동쪽 기슭에 조성되었으며, 500여개의 불감으로 구성되었다. 명사산은 자갈돌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조각에 적합하지 않아 흙으로 빚은 불상을 채색하여 봉안하였다. 5호 16국 시대인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굴은 268굴, 272굴, 275굴이 있다. 275굴 서벽에 봉안된 교각미륵보살상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다리를 X자로 교차한 채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특징이다(사진1). 이전 시대의 중국불상은 옷자락이 다소 두터워서 간다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 작품은 옷자락이 얇고 신체의 표현이 전보다 육감적이라 마투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목걸이와 영락으로 치장한 모습으로 보아 미륵불이 아니라 도솔천에서 수행중인 미륵보살임을 알 수 있다.
병령사 석굴은 412년 서진의 걸복씨가 포한(감숙성 임하시)에 천도한 후부터 활발하게 개착되어 현재까지 184개의 불감이 남아있다. 특히 169굴의 6감인 무량수불감 옆에서 서진의 건홍 원년(420)에 먹으로 쓴 제기가 발견되어, 석굴이 서진의 문소왕 걸복치반(412~428) 말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6감의 주존상은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눈을 반쯤 감고 선정인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명상 수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사진2). 옷자락은 얇아서 몸체의 윤곽이 그대로 다 드러난다. 채색이 많이 지워졌으나 가슴부분에 입은 옷을 보면 푸른색 바탕에 거북 등껍질 문양이 남아있다. 미술사 책에서는 "편단우견의 착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승기지를 입고 그 위에 법의를 걸쳤다"고 서술되었는데, 맨살을 드러내는 것을 천하게 드러내는 문화가 있어서 저렇게 법의로 한쪽 어깨를 가린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169굴의 7감 불입상은 옷자락이 얇고 신체에 밀착되어 있는 모습에서 마투라 불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사진3). 어깨부터 시작하여 가슴, 배, 허벅지까지 양감이 잘 표현되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시스루나 쫄쫄이를 입고 서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아무리봐도 전혀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불상을 보고 만든듯 매우 비슷한 금동불상이 태평진군 4년(443)에 조성되었다(사진4). 태평진군 4년은 북위가 돈황을 점령한 다음 해인 443년이다. 이 상의 조상기에는 "미륵하생용화삼회"라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미륵신앙이 유행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미륵하생용화삼회는 미륵불이 하생하여 용화수 나무 아래에서 3번의 설법으로 대중들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어렵고 힘든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평화를 가져다줄 영웅 혹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만큼 이 당시 미륵신앙의 유행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렇게 잘나가던 불교는 북위 태무제의 치세에 이르러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다. 불교가 겪은 고난은 불상의 모습에도 변화를 가져오는데, 어떻게 변했는지는 다음 글에서 쓰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