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 "고구려의 불교조각-1"에서는 불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면, 이번 글에서는 보살상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단독보살상
현존하는 고구려의 보살상은 불상과 마찬가지로 그 수량이 많지 않아 아쉬움을 더한다. 그래도 몇점이 남아있어 그 전모를 살펴볼 수 있으니 불행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먼저 살펴볼 상은 평양 원오리 출토 소조보살입상이다(사진1).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흙으로 빚어 구운 것이다. 입가에 지그시 미소를 머금고 있으면서 시무외 여원인을 하고 있다. 얼굴은 갸름한 편이고, 머리에는 족두리 같이 생긴 보관을 쓰고 있다. 얼핏보면 그 시대의 관리들이 쓰는 관모의 모습 같기도 하다. 목에는 중앙부분이 뾰족한 목걸이를 하고 있다. 양팔에는 천의자락이 걸쳐져 있는데 각자 한쪽은 발목 근처까지 내려와서 양쪽으로 펼쳐져 있고, 나머지 한쪽은 무릎까지 내려와서 엑스자로 교차하고 있다. 발 아래에는 연꽃모양의 대좌가 조각되어 있는데, 꽃잎이 꽤나 넓적하다. 6세기 중반 무렵의 상으로 추정된다.
사진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원오리 출토 소조보살입상. 얼굴 부위가 어두워서 안보이는 관계로 밝기를 약간 조정하였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보살입상도 있다. 이 상은 출토지가 알려져 있지 않아서 고구려의 것으로 확정지을 수는 없으나, 고구려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앞서본 원오리 보살상처럼 천의가 무릎 부근에서 X자로 교차하고 있으며 나머지 천의자락들은 양옆으로 뻗쳐있는 상태다. 마치 바람을 맞아서 옆으로 옷자락이 흩날리는 것마냥 생동감이 있다. 양쪽 어깨를 보면 중간에 뽕을 넣은 것마냥 튀어나온 장식이 있는데 마치 천의를 고정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얼굴 표정은 역시 미소를 짓고 있으며 턱은 다소 각져 있어서 꽤나 강인한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는데 정확히 무슨 모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세갈래로 갈라져 있다. 두손은 역시 시무외 여원인을 하고 있는데 몸의 크기에 비해 굉장히 크게 묘사되었다. 이 상을 제작했던 장인은 시무외 여원인을 통해 보살의 자비심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북위의 영향을 받은 6세기의 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진2. 왼쪽은 내가 찍은 사진이고 오른쪽은 e뮤지엄 사이트에서 다운받은 사진이다. 직접 찍은 사진은 얼굴이 어둡게 나와서 하는수 없이 다운 받았다.
일광삼존불상
일광삼존불이란 하나의 큰 광배를 한분의 부처와 두 협시보살이 공유하는 양식이다. 일반적으로 광배에는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처럼 화염무늬가 나타나 있는데, 부처의 위신을 빛으로 표현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빛을 표현하는 수단으로는 불꽃이 제격이다. 그리고 부처의 머리 주변으로는 지혜를 상징하는 원형의 두광도 나타내는데, 중심부에 연꽃이 있고 그 주변을 당초문 혹은 넝쿨문양으로 감싸서 묘사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광배의 뒷면에는 명문이 남아있는 경우가 상당수 있어서 당시의 불교 신앙이나 조각 양식의 변천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평양 평천리에서 출토된 영강 7년 신미년명 광배는 불보살은 없고 광배만 남아있다(사진3). 중앙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광배와 본존불을 따로 만들어 결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존불이 있던 자리 양옆으로 연꽃이 자라는 모습이 보이는게 특이하다. 뒷면에 명문이 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하여 미륵존상을 만들어 훗날 미륵불이 내려와 세 번의 법회를 할때에 듣기를 원한다'고 쓰여있다. 이로서 당시에 미륵하생신앙이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미륵하생신앙은 56억 7천만년 후에 도솔천에서 수행중인 미륵보살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와 성불하고 용화수 아래에서 세번의 설법을 하여 고통에 빠진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내용의 신앙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미륵불에 의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발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영강 7년 신미년은 고구려의 양원왕 7년인 551년으로 보는게 일반적이다.
사진3. 영강 7년 신미년명 광배. 뒷면에 명문이 있다는데 사진을 못구했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복제품이다. 원본은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있다.
간송미술관에도 일광삼존불이 한 점 있다. 계미년명 금동일광삼존여래입상이 그것인데, 상태가 온전하게 남아있다(사진4). 시무외 여원인을 한 부처의 좌우로 두 보살들이 협시하고 있다. 광배의 바깥쪽으로 화염문이 있고 두광에 넝쿨문양(당초문)이 있는 것이 앞서 보았던 영강 7년명 광배와 유사하다. 부처의 옷차림은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더욱 섬세하고 세련되게 발전한 상태이다. 뒷면에는 역시 명문이 있는데, '계미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하여 보화가 만들었다'고 쓰여있다. 대개 불상의 양식으로 보아, 학자들은 계미년을 563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돌아가신 부모의 극락왕생을 바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로서 당시 불교 신앙의 주요한 형태는 죽은 사람이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정토신앙이 주류를 이루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4. 출토지가 명확하지 않아 국적에 다소 논란이 있으나, 양식상 고구려의 상으로 보는게 일반적이다. 사진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마지막으로 볼 작품은 황해도 곡산에서 출토된 경4년 신묘년명 금동삼존불입상이다(사진5). 출토지가 확실하여 고구려의 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광배 뒷면에 명문이 있는데, '무량수상을 만들어 돌아가신 부모와 함께 미륵불이 있는 곳에 태어나 법을 같이 듣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무량수상은 아미타불을 말한다. 서방 극락정토로의 왕생을 담당하는 무량수상을 만들어놓고, 미륵불의 구원을 바라고 있으니, 얼핏보면 불상 발원자가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고, 당시 정토왕생과 미륵하생 신앙이 혼재되어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광배의 화염 문양을 보면 이전보다 상당히 직선적으로 변해있고, 3구의 화불이 표현된게 눈에 띈다. 본존불의 옷자락은 이전에 비해 좌우로의 뻗침이 덜하고 차분하게 내려와 있는 편이다. 그리고 목 주위의 법의가 둥글게 말려서 가슴부근까지 내려와 있는 것도 한가지 특징이다. 얼굴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고 머리에는 큼지막하게 둥근 육계가 표현되었다. 양 협시보살들은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여 어떤 보살인지 추정하기 어렵다. 보관이나 지물을 확인할 수 있다면 어느정도는 추정이 가능할텐데 아쉽다. 명문에 나오는 경4년 신묘년은 평원왕 13년인 571년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