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를 전공하면 학예사 말고는 답이 없는 것일까?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미술사학과(미사과로 줄임)에 원서를 넣었고 합격했다. 동국대 서울캠퍼스와 충북대, 동아대 이렇게 세곳의 학교에 지원했으며 동국대만 빼고 다 붙었다. 국립대인데다 학비도 싼 충북대가 있지만 불교회화의 전문가이신 박은경 교수님께서 계신 동아대를 선택했다. 충북대엔 새로 임용되신 불교조각 전공의 서지민 교수님께서 계신다. 졸업후 박물관 학예사로 취업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충북대에 가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아무래도 동아대보다는 충북대가 인지도가 높기 때문이다. 학벌에 더 욕심을 낸다면 둘 다 포기하고 한 학기를 더 투자해서 서울쪽의 학교로 가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이미 학예사를 원하는 석박사 출신 구직자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점에서 교수님만 보고 동아대를 가려는 내 선택은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미사과를 졸업하면 학예사가 되는 것만이 정답인가 하는 의문이 떠나지를 않는다. 애초에 미사과로 진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애정 때문이었다. 그저 문화재를 공부하고 싶어 적당한 미술사라는 전공을 고른 것일 뿐. 학예사하면 떠오르는 업무인 전시기획 일에도 관심이 없다. 어쩌면 이런 정신 상태로 학예사에 도전한다는 것은 수많은 구직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수도 있다.
학예사도 박물관에서 급여를 받는 직원이기 때문에 행동과 발언이 자유롭지 못한 측면이 존재한다. 회사원이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본인의 자유를 일정부분 희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예사 또한 내가 하고 싶은 주제의 연구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열악한 업계의 특성상 박물관 행정 일도 봐야하고 새로운 전시가 기획되면 직접 전시장을 꾸미는 일도 해야하는 등 어려운 점이 많다(물론 현직 학예사의 강의와 각종 인터넷 자료를 통해 접한것이지 직접 경험해보지는 못했다). 사립 박물관(미술관)의 경우는 박물관장이 누구냐에 따라 근무환경이 더욱 더 열악해지기도 한다. 급여수준도 열악해서 기회비용 측면에서 본다면 그냥 전에 다니던 중소기업을 다니는게 더 나을 수도 있다.
학예사의 단점만 열거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예사가 좋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유물을 가까이서 보면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일 것이다(다른 누군가는 스스로 전시를 기획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낄 것이고). 특히나 유물을 가까이 접하면서 사진도 마음대로 찍고 일반에는 잘 공개되지 않는 수장고의 희귀 유물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많다. 같이 일하는 동료 학예사들과 교류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학예사들은 최소 석사 출신이고 모두 연구 능력을 갖춘 분들이기 때문에 이들과의 교류는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야을 넓혀줄 것이다. 게다가 박봉이라도 꾸준히 급여가 들어온다는 점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안정감을 준다.
이런 장점들이 있기에 학예사를 꿈꾸는 구직자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지레짐작으로 포기할 생각은 없다. 일단 뽑아만 준다면 짠 급여와 열악한 근무환경은 그냥 열정으로(?) 돌파해보려 한다. 왜냐하면 근무환경이 상당히 열악한 지역인 인천에서, 그것도 X소기업만 다닌 경력이 꽤 되므로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만 아니라면 어느정도는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좋아하는 분야의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최소 2~3년 정도는 학예사로 근무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생각한다.
그렇지만 학예사를 채용하는 기관은 매우 적고, 원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는 점에서 대안을 생각해두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비해 박물관 수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대부분 국가의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반면 문화예술분야 석박사는 매년 쏟아지고 있다. 학예사를 원하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가보면 회원 수가 상당히 많다. 그들중 대부분이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거나 이미 졸업하여 학예사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 정부 들어서 정책이 바뀌면서 박물관에서 비정규직으로 경력을 쌓기도 쉽지 않아졌다. 석사학위 취득 후 최소 2년의 경력을 쌓아야 정학예사 3급 자격증이 나와서 정식 근무를 할 자격이 갖추어지는데 자격 요건을 갖출만한 공고도 예전보다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매불망 학예사만 바라보는 것은 감나무 아래에서 입벌리고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미리 지레짐작하고 포기하면 안되겠지만 차선책도 함께 준비해야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뭘까? 그걸 알고 있으면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런 영양가 없는 긴 글을 적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나쁜 머리를 굴려서 몇가지 생각해 보았다.
8번은 너무나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 제외하고, 1번은 지나치게 염세적이라 제외한다. 5번은 중앙일보 문화부의 문소영 기자를 예로 들 수 있다. 故 오주석 선생님도 학예사로 근무하기 이전에 코리아 헤럴드 기자로 활동한 적이 잠깐 있었다.
하지만 기자도 되기가 어렵고, 1인 미디어가 득세하면서 언론의 영향력은 예전만 못한것 같다. 또 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학예사와는 다른 차원의 노력이 추가적으로 필요할텐데, 그것까지 감당할만한 능력이 안되므로 배제한다.
7번. 이런 단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있어도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부여 규암리 출토 금동관음보살상을 공부하면서 알게된 문화유산회복재단 정도가 괜찮아 보인다. 나도 이참에 한군데 만들어 볼까나?
3번과 4번, 6번을 결합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면서 무난해보인다. 1인 미디어 탓에 출판업계 역시 어려우므로 4번을 잘한다면 좋을듯 싶다. 특히 4번을 잘한다면 학예사로 일을 구하는데도 일정부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게 잘되면 2번 의뢰도 간간이 들어오겠지. 인스타그램을 보면 2번을 위주로 활동하는 분들이 많이 보이는데, 나는 전문적인 연구자가 되고 싶으므로 2번으로 만족하며 머무르고 싶지는 않다.
3,4,6번을 잘해서 뜬 대표적인 사람이 설민석이다. 하지만 전문성의 부족으로 한순간에 몰락하고 말았다. 돈은 많이 벌었을지 몰라도 명예는 실추되었다. 최진기라는 사람도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이들의 사례는 어디까지나 전문성이 밑바탕이 되어야한다는 교훈을 준다. 말재주로 단기간에 흥할 수는 있어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개인적으로나 공개강연을 통해 만나본 훌륭한 문화재 작가들이 몇분 계신다. 사적인 정보라 함부로 말씀드리기는 곤란하지만, 모두들 어려운 길을 개척하셨다는 점에서 존경할만한 분들이다. 개인적으로 故 성낙주 선생님을 만났던게 기억에 남는다. 미술사를 전공하신 것도 아니고,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시면서 시간도 부족하셨을텐데 석굴암 연구의 권위자로 인정받으신게 놀랍다. 작년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너무나 안타까웠다. 코로나 핑계로 조문도 가지 못했는데, 이 글을 빌어서 정말이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잠깐 말이 옆으로 샜다. 다시 돌아와서 결론을 내려보자면 졸업하고 학예사 준비를 함과 동시에, 유튜브를 하고, 대중들에게 보여줄만한 글도 틈틈이 쓰고, 답사를 다니면서 찍은 고화질의 사진도 인스타에 올리고, 그와 별개로 문화재 공부도 계속하고, 최대한 이것저것 많이 병행 해야한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N잡러, 그게 답이다. 이렇게 열심히 한다고 해도 큰 부를 얻기는 힘들 것이다. 부를 얻고 싶다면 부업을 하던가 주식과 부동산 같은 자산에 투자를 해야할 것이고. 이 모든걸 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역사와 전통문화가 좋다면 어쩔 수 없이 감당해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