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불화에 나타나는 강한 위계 질서
우리 문화유산 가운데 절반 이상이 불교미술일 정도로 우리 역사와 불교는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지녔다. 불교미술은 크게 조각, 회화, 공예로 분류할 수 있으며, 넓게보면 건축까지 포함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회화는 조각과 함께 가장 대중적인 불교미술이다. 평면적이어서 3차원의 조각보다는 입체감이 떨어지나, 붓과 안료를 사용하므로 화려한 색감, 다양한 존상을 표현할 수 있다. 조각에 비해 표현의 자유도가 높으므로 서사(스토리)를 나타내기 적합한 장르이다(사진1).
불교가 성행한 고려시대에는 최고급 비단에 좋은 안료와 금니(금가루)를 사용한 불화가 제작되었다. 현재까지 약 170여점이 남아 당시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억불 숭유의 조선시대에는 주로 민중의 후원으로 불화가 제작되었으며, 비단 대신 마(麻)와 모시 같은 거친 재질이 바탕 천으로 활용되었다. 안료는 두텁게 칠해져 고려 불화에 비해 다소 탁한 색감을 띤다. 이렇듯 재료나 표현 기법의 측면에서 고려와 조선 불화의 차이는 현저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측면에서 양 시대 불화의 차이점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시대상의 변화를 읽어보고자 한다. 부족하나마 이 글을 읽고 우리 문화유산을 애호하는 분들이 더 입체적으로 불화를 감상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먼저 고려 사회에서 불교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설명한 뒤, 불화를 살펴보겠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불교를 숭상하였다. 수도 개경에는 수많은 사찰들이 들어섰고, 국가차원에서 매년 연등회와 팔관회라는 대규모 행사를 주관하였다. 이들 행사는 불교에 근간을 두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거란이나 몽고 등의 외적을 격퇴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경 조판(造版)이 이루어졌으며, 원(元) 간섭기 이후에는 개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차원에서 금은니(금ㆍ은가루)를 활용한 호화로운 사경(寫經, 경전을 베껴쓰기)이 다수 이루어졌다(사진2). 따라서 불교가 고려 사회에 끼쳤던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 그 이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불교계에서 가장 권위있던 승려들은 국사(國師)와 왕사(王師, 왕의 스승)로 임명되어 존경을 받았다. 조정에서는 불교와 관련된 행정을 맡아보는 기구도 존재했으며, 승려들도 승직을 임명받아 활동했다. 이렇게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보니 왕실과 귀족의 자제 중에도 출가하는 이들이 많았다.
고려 불화는 촘촘히 짜여진 고급 비단에 좋은 안료를 활용하여 그려졌다. 특히 색상이 매우 곱고 선명한데, 그 비결은 배채법의 활용이다. 뒷면에 채색을 하거나 단계별로 채색한 여러 폭의 비단을 덧대어 원색이 그대로 노출되는 대신 뒤쪽에서 은은하게 배어나오도록 하였다. 이러한 방식을 활용하면 우수한 색감은 물론이고 안료가 탈락되는 현상도 줄일 수 있다. 다만 조성하는데 더 많은 정성과 물자가 필요할 뿐이다. 이는 불화 제작에 큰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만큼 불교에 헌신적인 사회 분위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사경 변상도 역시 불화로 간주되는데, 필사한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압축하여 보여주려는 목적에서 그려졌다(사진3). 일종의 삽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경전의 수호를 목적으로 내용과 관련없는 신장상을 그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대개 사경의 앞머리에 위치하며, 금은니를 이용한 선묘기법이 활용된다.
모든 고려 불화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구도를 보면 대개 본존과 권속간의 엄격한 위계질서가 드러난다. 먼저 보스턴미술관 소장 <원각경변상도>를 보자(사진4). 화면 상단의 중앙에는 커다란 크기의 노사나불이 앉은 채 설법을 하고 있다. 노사나불은 본 도(圖)의 주인공으로서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지녔으며, 다시 그 둘을 에워싸는 큰 거신광을 나타내고 있다.
노사나불의 가슴 아래쪽 좌우에는 사자를 탄 문수보살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자리 잡고 있다. 둘은 협시보살이지만 본존보다 한 단 아래에 위치하며, 크기도 작게 표현하여 낮은 위계를 보인다. 그 아래쪽으로는 더 작은 크기의 보살 10위가 합장한 모습으로 앉아 있고, 그 아래로는 사천왕을 비롯한 각종 신장들과 대범왕(大梵王)을 비롯한 여러 권속들이 합장한 모습으로 서있다. 화면의 아래로 내려갈수록 존상들의 크기가 작아지며, 본존과 가까운쪽에 보살을 배치하고 먼곳에 신장들을 배치한 점은 위계에 따른 질서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 다른 고려 불화를 살펴보자(사진5). 아래 작품은 2014년 새롭게 공개된 <수월관음도>로, 기존에 알려져있던 다이토쿠사(大德寺) 소장본 및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본과 유사한 도상이다. 용왕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보타락가산의 수월관음을 찾아오는 모습이다. 이들은 관음에게 공양을 드리려는듯 각자 지물을 하나씩 들고 있다. 화면 좌우측에는 본존이 수월관음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쌍죽과 정병이 묘사되었다. 화면 하단부에는 등에 보주를 짊어진 반인반수형 인물 옆으로 누군가의 옷깃이 휘날리고 있는데, 화면 가장자리의 일부가 잘려나갔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옷깃의 주인공은 선재동자로 추정된다.
본 도에 표현된 관음보살과 일련의 공양인물군상은 현격한 위계 차를 보여준다. [사진4]에서 보았던 보스턴미술관 소장 <원각경변상도> 와 같은 맥락이다. 다음으로 살펴볼 작품은 <아미타삼존도> 이다(사진6).
높고 화려한 대좌 위에 아미타불 1위가 앉아있는데, 위로 들어올린 오른손은 엄지와 약지를 구부렸으며 허벅지 지에 올린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리고 있다(이런 손모양을 흔히 하품중생인으로 말해왔으나, 최근 이러한 용어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상황이다). 아미타불의 무릎 아래 좌우로는 백의를 입은 관음과 손에 경함(經函)을 든 대세지가 협시보살로 서있다. 이 작품에서도 본존인 아미타불은 두 협시보살에 비해 매우 크게 표현되어있다. 제 아무리 보살이라도 부처의 권위는 넘볼 수 없다는걸 보여주려는 의도일까?
마지막으로 소개할 고려 불화는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소장한 <지장보살도>이다(사진7). 본 도에서는 지장보살이 주존이며,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 등이 보좌하는 역할로 함께 등장한다. 앞에서 살펴본 작품들처럼 주존과 권속의 위계 차가 명확하게 드러나있다. 그렇다면 고려 불화의 이러한 특징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우리 역사에서 고려는 중세로 분류되는데, 이 시기는 여러모로 통일신라에 비해 발전하였으나 백성들의 신분 상승은 여전히 어려웠다. 귀족제 사회였기 때문이다. 과거제가 도입되긴 하였으나, 모든 인재를 과거로 뽑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고위직은 음서로 세습되었다. 한번 귀족은 영원한 귀족이었고 백성은 영원한 백성이었다. 그러므로 신분질서에 따른 위계는 매우 공고하였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 사회에서 불교는 국교였므로 그 위상이 남달랐다. 국사와 왕사의 경우, 왕과 귀족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으니 불교계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그러한 인식이 불화에 반영되어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와 보살은 권위적으로 크게 그리고, 그렇지 못한 존재(중생)들은 작게 묘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시대상은 조선이 건국되며 크게 뒤바뀌고 마는데, 불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불화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