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풍속화가 신윤복이 그린 <연소답청>입니다(사진1).
이 작품은 한적한 교외를 묘사했습니다. 작은 새싹들이 여기저기 올라오고, 꽃나무에 붉은 꽃이 피어있어 이른 봄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인물이 8명 등장하는데, 크게 위쪽 5명, 아래쪽 3명으로 구분됩니다.
먼저 아래쪽 세사람을 보시죠(사진2). 이들은 어딘가 바쁘게 이동중입니다. 말에 탄 기생이 쓴 장옷은 바람 때문에 뒤쪽으로 펄럭이고, 뒤따라 가는 젊은 양반도 옷자락이 뒤로 펄럭입니다. 거센 바람 때문에 속에 입은 누비 옷이 드러났습니다. 누비 옷을 입을 정도면 아직은 쌀쌀한가 봅니다. 바람이 보행에 지장을 주는지 갓끈도 풀어 어깨 뒤로 넘겼습니다. 어짜피 인적이 드문 곳이니 예의나 체면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한동안 계속 이렇게 걸었는지 얼굴에도 웃음기가 없습니다. 약간 언짢은듯한 표정인데, 어서 빨리 가야한다는 마음만 있나봅니다. 앞서 말고삐를 잡은 말구종도 말없이 묵묵히 앞으로 걸어갑니다.
한편, 위쪽 다섯명은 꽤나 여유로워 보입니다(사진3).
제일 눈에 띄는 존재는 말에 탄 기생 두명입니다. 각자 누런말과 검은말에 탔는데, 곱게 물들인 청색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부풀어오른 치마가 말에 오르니 더더욱 풍성해 보입니다. 반면, 저고리는 상당히 작고 타이트 합니다. 풍성한 치마와는 정반대죠. 풍성한 치마와 작고 타이트한 저고리, 이러한 스타일을 일명 하후상박이라고 합니다. 하후상박은 신윤복의 미인도에도 나타나는데, 당시 사대부들이 이를 비판했던 기록이 남아있을만큼 여성들에게는 이러한 패션이 매우 큰 유행이었습다(사진4).
오른쪽 흰 저고리를 입은 기생은 머리에 꽃을 꽂아서 나들이 온 기분을 한껏 내고 있습니다. 왼손으로는 긴 담뱃대를 잡고 있죠. 지금은 높은 사람 앞에서 담배를 피면 실례가 되지만, 저당시에는 그런 예절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왼쪽 풀색 저고리를 입은 기생은 왼쪽을 보며 손을 뻗고 있는데요. 저런, 갓 쓴 청년 양반이 두 손으로 공손하게 담뱃대를 대령하고 있군요. 누가보면 기생이 상전이고 양반이 노비인줄 알겠습니다. 이 여인도 어린 양반에게 이런 대접을 받으니 황송하고 민망한가 봅니다. 얼굴이 살짝 붉어졌습니다.
아니, 왼쪽 맨 끝에 있는 이 남자는 왜 이렇게 굳은 표정일까요? 살짝 뭔가 언짢은듯한 얼굴 같기도 한데요. 왼손에는 채찍을, 오른손에는 갓을 들었군요. 왜 갓을 머리에 안쓰고 저렇게 들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혹시 오른쪽 끝에 있는 사내 때문이려나요?(사진5) 이 인물은 턱수염이 있어 일행 중 가장 연장자로 보입니다. 겉옷 안에 누비 옷 두벌을 색깔 맞춰입고, 허리춤에는 주머니와 파란색 띠까지 매달고서 꽤나 맵시를 부렸네요. 옷차림도 그렇고, 기생을 상대하는 여유로운 표정도 양반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은 머리에 쓴 모자입니다. 양반들은 갓을 쓰는게 일반적인데, 이 사내가 쓴 모자는 갓이라고 하기에는 양태(챙)가 좁은 편이죠. 대우(위로 솟은 부분)도 각잡힌 모양이 아닙니다. 둥글둥글하죠. 사실 이 모자는 양반의 갓이 아닌 하층민이 쓰는 벙거지입니다(사진5). 옷은 분명히 양반인데 모자는 벙거지라니, 이런 미스매치는 어떻게 봐야할까요?
잠깐, 이 남자의 왼손을 보실까요? 말고삐를 잡고 있죠. 기생을 즐겁게 해주려고 말구종 행세를 하는겁니다. 그러고보니 왼쪽에 있던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채찍을 들고 있었죠. 원래 이 사람이 말구종인데, 이 양반이 말구종 행세를 한다고 벙거지를 빌려쓰고, 원래 자기가 쓰고 있던 갓을 이 말구종한테 잠시 맡긴겁니다. 이 말구종은 차마 윗사람이 쓰는 갓을 쓸 수 없으니 저렇게 손에 들고 있는 것이고요. 양반이 자기 모자를 빼앗아 쓰고, 기생 앞에서 자신을 흉내내고 있으니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겠죠. 그래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작품을 분석한 결과, 8명의 인물들은 이른 봄 경치 좋은 곳에서 꽃놀이를 즐기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이죠.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아래쪽 3명은 약속 시간에 늦었고, 미리 도착한 5명은 기다리는동안 무료하니 저렇게 기생을 데리고 놀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도 벚꽃피는 봄에 꽃놀이를 많이 가는데요. 당시에도 비슷한 문화가 있었던 것이죠. 그러한 풍속을 포착하여 그린 작품, 신윤복의 <연소답청>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