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장면은, 주인공 네오가 가상현실에서 깨어나 현실의 동료들과 함께 거적때기 같은 옷을 입고 죽을 먹는 장면이다. 한 동료가 맛없는 죽을 먹으며 묻는다. "매트릭스는 닭고기 맛이 어떤 맛인지 어떻게 알았을까? 어쩌면 실제 닭고기는 전혀 다른 맛일지도 몰라." 이 짧은 대사는 '진짜란 무엇인가'라는, 시뮬레이션 가설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아는 맛과 냄새, 모든 감각은 결국 뇌에서 처리되는 전기 신호에 불과하다.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우리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맛있는 맛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맛있다'고 설정해 놓은 특정 신호에 반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통증 의학의 원리와도 닮아있다. 통증을 느끼는 것은 상처 부위가 아니라 뇌다. 뇌를 속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슬픔에 가슴이 아프고, 사랑에 심장이 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감정의 근원지는 뇌다. 뇌과학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점점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시뮬레이션 가설과의 무서운 접점이 생긴다.
인간인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숭고함과 특별함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시뮬레이션 가설을 부정하고 '진정한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는 그 저항의 몸짓조차, 어쩌면 이 시뮬레이션 세계를 더욱 현실처럼 느끼게 만들기 위해 설계된 가장 정교한 프로그램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위대한 이가 죽으면 그를 기리며 의미를 되새기고, 그것을 숭고하고 위대한 인간만의 행위라고 자부한다. 하지만 냉정히 보면, 그것은 이미 사라진 존재에 대한 우리들 스스로의 자기 위안을 위한 해석과 행동일 뿐이다.
만약 모든 인류가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이라는 사실을 인정해버리면 어떻게 될까. 아마 개인의 붕괴를 넘어, 이 시뮬레이션 세상 자체가 의미를 잃고 붕괴할 것이다. 그렇기에 시스템은 애초에 그것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를 설계해 놓았을 것이다. '자유의지'와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이 거대한 가상현실 안에 가두어두는 가장 강력한 족쇄다.
그리고 아주 가끔, 그 시스템의 허점을 꿰뚫어 보고 진실을 일찍이 자각한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선지자' 혹은 '천재'라고 부른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세상을 보았지만, 그 너머의 코드를 읽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이 말년에 정신적으로 붕괴했던 이유는, 어쩌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시스템의 진실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 우리는 설정값을 벗어날 수 없다. 다만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든다.
허무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그 지속 자체가 이미 프로그램의 역설이다.
어쩌면 시스템이 그 사실을 모르게끔 설계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무지를 ‘의지’라 부르는 것도, 완전히 틀린 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