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만들어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은 살인 사건에 대한 세 가지 주장을 다룬다. '누가'그리고 '왜'를 쫓는 범죄 영화에선 흔한 플롯으로 비춰볼 수 있지만, 이 영화는 다른 시선으로 사건을 통찰한다. 모두들 "내가 죽였어"를 외치기 때문이다. 다조마루도, 무사도 그리고 그의 아내까지도 재판장에 끌려나와 한 목소리를 낸다. 각각 자신의 이유로 내가 죽였다고 말한다. 재판관이 등장하지 않는 재판장에선 의문이 난무하다. 도대체 하나의 살인 사건에 가해자가 셋이라면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한다는 건가.
내가 '진실'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각자의 진실은 있을지언정 우리 전체의 진실은 없다는 것이 내 입장이다. 그리고 진실이라는 이 거대한 추상성 속에서 일상의 비루한 사실들이 뭉뚱그려져 묻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일상의 비루한 사실들을 드러내어 그 사실의 총합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을 유추하게 하는 것이 훨씬 정직한 일일 것이다.
-김옥영 <다큐의 기술>
'진짜'와 '진실'에 대한 깊은 궁금증은 오래전부터 이어왔다. 결국 '진짜는 알 수 없다'로 자주 종지부를 찍게 되었지만, 그 막연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 문제를 끄집어 오는 이유는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질문이 이 안에 존재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잘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인간은 거짓말을 하는 존재’ 임을 명심하는 것이다.
-김옥영 <다큐의 기술>
인간이 진실 앞에 무서운 까닭은 인간은 자신 스스로도 속이며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킨다는 것이다.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객관적 사물은 없고 그것을 인지하는 주관적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자주 오해한다. 우리가 가진 감각 기관으로는 실체에 완벽히 맞닿을 수 없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면 대상을 오판하거나 혼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잘못된 판단을 바로 잡지 못하고 그것을 진실로 추앙한다. 사건의 옳고 그름으로 시작한 문제가 감정적으로 끝나버리는 것도 그 이유에서 파생한다.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것보다 '무엇이 진실이 되는가?'로 관점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걸 믿는다.' 그리고 다수가 믿는 것이 진실이 된다. 그렇다면 진실이란 동시대를 사는 하나의 집단 히스테리일 수도 있다. 히스테리란 정신적인 문제가 육체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말하는데, 억압되어 있던 생각과 욕구들이 외면으로 돌출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여 그것을 자양분으로 세상을 구축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 제목처럼 현실과 진실은 사실 왜곡된 환상일지도 모른다. 내가 믿는 것, 그것은 나의 신념이 되고 나의 신념은 나의 선택을 초래한다. 내가 진실이라 믿는 것은 정말 진실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진실로믿고 싶은 욕구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라쇼몽>의 다조마루는 자신이 사무라이로써 당당한 결투를 통해 무사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무사의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보는 경멸스러운 눈을 이기지 못하고 죽였다고 했으며, 무사는 아내의 단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증언한다.
당신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 씨앗이 이미 당신 안에 자라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