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by 유리


그날 이후 홍주와 혜정은 자주 만났다.


어떤 주는 매일 볼 때도 있었다.


술 마시고 수다를 떨다 보면 시간이 훌쩍 흘러있었다. 어차피 속했던 그룹이 해체해 스케줄이 많지도 않던 홍주는 혜정에게 동료 욕도 하고, 매니저 욕도 했다. 왕년에 이만큼 잘나갔다며 중국에서 홍주를 향한 환호성이 얼마나 컸는지, 같이 드라마 찍다가 사귀었던 태국 여배우가 홍주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등등을 자랑했다.


혜정에게는 못 할 말이 없었다.


새어나갈 일이 없었으니까.



요즘에는 사람들도 무작정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믿지 않는다. 이야기의 확실한 출처와 그것에 대한 인증이 없으면 믿지 않는 세상이다. 혜정이 홍주에게 들은 말을 전부 인터넷에 폭로해버린들, 정확한 출처와 혜정이 누구인가에 대한 인증이 없으면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내가 연예인으로서 이미지 꽤 괜찮잖아?'


홍주는 항상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 사람들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며 "pdf 땄습니다 소속사에 보낼게요" "중립기어 박습니다" 하고 댓글로 대신 싸워줄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아이돌인데!


그래서 홍주는 옷장에 대해 꽁꽁 숨기고 있는 혜정이 인터넷에 자신의 이야기를 폭로하지 못 할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려면 애초에 그들의 만남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도 밝혀야 할테지. 혜정은 절대 그러지 못 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편, 혜정은 홍주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게 마냥 즐거웠다. 무슨 이유에서든간에, 혜정은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처음에는 관심없는 연예인이었지만, 슬슬 진짜로 홍주의 팬이 돼가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어느새 팬보다 더,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마음도 자라나고 있었다.


그런 성인 남녀가 단 둘이, 그것도 작은 방 안에서 술 마시며 속에 있는 이야기까지 다 꺼내다 보니 몸이 가까워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느새 슬그머니 연인 같은 사이가 돼 버렸다.


다만, 둘이 다른 연인들과 다른 두가지가 있다면, 바깥에서는 절대 만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서로의 집 주소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둘은 서로의 주소를 몰라도 매일 만날 수 있었고, 바깥에서 만나지 않아도 누구보다 가까웠다.



오히려 서로 그걸 더 원했다. 홍주는 아무리 한물간 연예인 소리를 듣더라도, 괜한 스캔들로 아이돌 이미지에 먹칠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상대는 탑 여배우도 아니고, 평범하디 평범한 혜정이다. 소속사와의 계약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괜히 말 나와서 일을 그르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혜정 역시 주목받는 건 딱 질색이었다.


어릴 적부터 혜정은 남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주목받으면 언제나 상처만 돌아왔다.


혜정은 아빠 없이 자랐다. 동네의 유명한 사생아였다. 당연히 혜정을 보는 시선은 못마땅했다. 특히나 혜정이 사는 곳은 좀 사는 사람들은 모여 산다는 청담동이었다. 날고 기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그런 탓에 동네 사람들이 혜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 곱지 않았다. 혜정의 엄마는 그런 시선을 홀로 견뎌내며 혜정을 키워냈다.


사실, 전혀 부족함 없이 키워냈다.


혜정이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은 언제나 부족하지 않게 사줬다.


어렸을 적, 혜정은 엄마가 어떻게 돈이 많을까 궁금했었다. 궁궐같은 집은 아니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세 번 네 번 졸라야 겨우 사주었던 것들도 혜정의 엄마는 척척 사줬다. 그 때문에 동네에서는 유력 기업 회장이 혜정 엄마의 스폰서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이런 저런 소문과 그녀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에 혜정은 엄마에게 여러 차례 이사를 가자고 졸랐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해주던 엄마가 이사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아주 단호했다.


이유를 물어도 돌아오는 건 안 된다는 말 뿐이었다.


혜정은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엄마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응..괜찮아. 괜히 나 때문에 휴가 내서


쉬지도 못 하고. 미안하네."


"아니야. 당연한 건지. 그런 말 하지마"


"아니야. 이제 진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나 봐"


"엄마..."


"혜정아...미안하다. 정말. 너한테 이런 부담을 안겨주고...정말 미안해. 괜히 그날 너한테 들키지 않고, 내 선에서 그걸 없애버리든가 해야 했는데...엄마가 그래도 우리 딸 낳은 거


후회 안해. 정말이야."


"엄마..."


혜정은 눈 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뺨 위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엄마가 볼세라 얼른 그것을 닦았다. 솔직히 엄마가 역겹다고도 생각했고, 창피하다고도 생각했고, 어떤 때에는 도망가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혜정은 알았다. 엄마는 정말 큰 위험을 감수하며 혜정을 낳은 거고, 혜정을 위해 정말 많은 걸 해주었다는 걸.


그런 엄마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옆에서 보기에도 엄마의 시간은 길지 않아 보였다. 자다가 피를 토하는 경우도 있었고, 힘겹게 먹은 걸 다 게워내는 날도 있었다. 엄마의 시간은 빠르고, 고통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혜정이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오늘처럼 엄마를 병원에 데려가 진통제를 타고, 영양제 주사를 맞혀주는 것 뿐이었다.


"혜정아. 엄마는 이제 한 3개월 정도 남은 것 같아. 처음 썼던 때가 매미가 지독하게 울었던 여름날이었으니...벌써 그 때부터 37년이 지났네."


옷장을 사용하는 그 순간부터, 옷장의 주인은 37년의 인생을 부여받는다. 정확히는 옷장으로 무언가 불러낸 그 때부터 37년.


엄마는 갓 스무살이 되던 해, 그러니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딱 5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 처음으로 옷장을 사용했다고 했다. 그 전까지는 옷장을 쓰지 말아달라는 할머니의 간곡한 유언 때문이었다.


사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최대한 늦게 옷장을 사용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마도 오래오래 인생을 꽃 피우다 늦게늦게 저승으로 오라는 딸을 향한 애틋함 때문이었겠지.


스무살이었던 엄마의 나이가 올해로 쉰일곱이다. 엄마의 시간과 맞바꾼 옷장의 능력은 이제 서서히 다음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레베이터 앞 몇 개의 계단도 힘겹게 올라간 혜정의 엄마가 숨을 고르고 혜정에게 말했다.


"넌 쓸거면 최대한 늦게 써. 사고로 죽지 않는 이상, 별다른 일 없으면 37년은 보장받는 거야. 50살에 쓰면 87살까지, 60살에 쓰면 97살까지 보장 받잖아. 엄마는 욕심이 많아서 너무 일찍 쓴거야 바보처럼. 이렇게 예쁜 우리 딸이랑 오래오래 있지도 못 하고"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 우리딸은 엄마보다 똑똑하니까 알아서 잘 할거야. 그냥 태워버려도 돼. 저런 거에 인생 묶여버리지 말고. 옷장을 쓰는 순간, 네 인생은 확실히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어져"


",,,,"


혜정은 대답을 못 했다. 엄마의 끝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데, 혜정은 아직 옷장을 어떻게 해야할지 제대로 생각해 보지 못 했다.


엄마가 예전에 말했던 37년의 시간이 아주 까마득히 멀기만 한 시간일 줄 알았는데, 어느새 쏜살 같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30살. 그리고 더하기 37년. 67살. 죽기에 딱 좋은 나이인가. 이른 나이인가.


띵동


엘레베이터가 1층에 멈췄다. 엄마를 부축해 조심스럽게 엘레베이터에 탄 혜정은 4층을 눌렀다. 평소 혜정 혼자 있을 때는 계단으로도 종종 걸어서 올라가기도 했던 높이. 하지만 언제나 호기롭게 시작했다가 3층쯤 되면 헉헉대며 후회하게 되는 높이 4층. 그렇다고 오랫동안 엘레베이터를 기다렸다가 타고 가기에는 꽤 손해보는 것 같은 높이. 죽기에 애매한 나이 67살과 걸어 올라가기 애매한 높이 4층이라... 혜정이 엄마의 팔을 잡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엘레베이터는 4층에 도착했다.


"가자"


혜정이 엄마를 잡아끌었다. 비밀번호를 누르려고 현관문 앞에 섰는데 어라? 문이 열려 있었다.


"엄마. 우리 문 안 잠그고 갔나 봐"


"아까 제대로 안 닫혔나 보네"


"그런가 봐"


그때 엄마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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