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도 요즘 눈치로 혜정의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모르기 어려웠다. 홍주 주변에 워낙 여자들이 많으니까 애초에 여자 심리를 잘 아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혜정의 표정이나 말투가 점점 홍주가 지겨워 했던 전 여자친구들 모습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확실히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졌다. 뭐랄까. 홍주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느껴지던 담백함? 이런 게 사라졌다. 그녀가 관계 정립을 원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했다.
홍주는 아직 비밀이 많은 혜정을 품을 자신이 없었다. 몸이 가까워지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 곳에 여러 번 오갔지만, 여전히 혜정의 방에 있는 섬뜩한 창문이며, 쇠창살 덧문은 감당하기 버거웠다. 혜정이라는 인간은 나쁘지 않고 그녀와 보내는 시간 역시 즐거운 건 사실이었지만, 그녀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가는 건 아직 두려웠다. 그냥, 지금처럼 사람들 모르게 흔적 없이 오가는 사이를 좀 더 유지하고 싶었다.
둘은 말 없이 술을 마셨다.
'오늘 괜히 왔네. 열받아서 온 건데 이런 분위기에서 말하기도 뭣 하고. 적당히 마시다 볼 일만 보고 가야겠다'
홍주가 혜정의 얼굴 표정을 살피며 생각했다. 그때, 가만히 있던 혜정이 적막을 깨뜨렸다.
"저기..나 오늘 백화점 갔었어"
"백화점? 왜? 뭐 살 거 있었어?"
"너 인스타에 올렸었잖아. 시계"
"까르띠에?"
"응. 그거"
"왜? 설마 너 그거 샀어?"
홍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려 1200만 원짜리를 샀다는 건가. 혜정이 그렇게 돈 많은 사람이었나. 짧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홍주를 스쳐 지나갔다.
"아니"
그럼 그렇지.
홍주는 캔맥주 하나를 더 깠다. 푸슝.
경쾌한 소리와 함께 하얀 거품이 캔 위로 뽀글뽀글 올라왔다. 시계를 산 건 아니라는 말에 잠시나마 기대했던 마음이 맥주캔 마냥
김 팍 새버렸다.
"그거 예쁘지?"
"응. 예쁘더라. 너가 왜 갖고 싶어하는지 알겠어."
"응. 그거 하나 밑의 버전을 송한이 놈이 가지고 있어."
"송한이가?"
"응. 이 놈이 얼마 전에 샀는지 인스타에 은근 자랑질 하더라. 보여줄까?"
"응"
홍주는 송한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여주었다. 팔로워 수부터 홍주와는 몇 배, 아니 몇백 배 차이나는 듯 했다. 홍주의 인스타그램과는 차원이 다른 좋아요와 댓글 수. 홍주가 같은 멤버였던 송한에게 왜 자격지심 비슷한 마음이 생기는지 알 법도 했다.
"이것 봐. 이 자식 좀 전에 또 올렸네."
"어디 봐"
송한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진이었다. 5초 전 게시물인데도, 좋아요 수가 벌써 1만 개에 육박했다.
"여기, 여기 봐봐. 이 자식 손목"
과연, 홍주의 말대로 송한의 손목에는 손목 시계가 있었다.
"잘 안 보이는데."
"또 있어. 아주 징하게 차고 다녀서 사진마다 있다니까"
피드를 쭉 내리는데 홍주의 말대로 송한의 손목마다 시계가 있었다.
"확대해 봐도 돼?"
"응. 대신 좋아요 안 눌리게 조심해. 그 자식 게시물에 좋아요 누르기 싫어"
확대해 보니 아까 까르띠에 매장에서 봤던 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사실, 혜정의 눈에는 무슨 시계인지 구별이 잘 안 될 정도로 사진 속 작은 일부분일 뿐이었는데, 그걸 보고 무슨 시계인지까지 캐치해내는 홍주가 신기했다.
뭐, 그만큼 많이 갖고 싶으니까 많이 찾아봐서 아는 거겠지.
"저거 혹시 800만 원짜리 그건가?"
"어!어! 맞아. 어떻게 알아?"
"아까 매장에서 봤어."
"아, 잘 나가는 거지 저것도."
"잠깐만"
혜정은 휴대폰을 꺼내 아까 몰래 찍은 시계 사진을 홍주에게 보여줬다.
"이거 맞지?"
"응. 맞아. 이건 어디서 찍었냐"
"아까 거기 매장에서."
"크크크크. 그런 걸 왜 찍냐. 매장 내에서 사진 찍으면 안 되는 거 아냐?"
"뭐..그렇긴 한데..그냥..그냥 찍어봤어"
"진짜 이상해 너 크크"
"...어쨌든 저것도 예쁘더라."
"응. 저것도 예쁘긴 해. 그런데 내가 인스타에 올린 게 최고 간지긴 하지. 그거는 다이아도 박힌 거야. 하 그거 사려면 라디오를 몇 탕 뛰고, 여섯시 리포터를 몇 탕 뛰어야 하는거냐. 돈 많은 중국 팬이 척 하고 선물해주면 좋겠다. 크크"
"..그러게. 사실 그거는 얼마나 하나 궁금해서 가봤었는데 진짜 비싸더라고."
"왜? 너가 사주기라도 하게?"
"뭐..."
"하하하하하하하. 야 됐어 됐어. 나도 못 사는 걸 너가 어떻게 사냐. 너한테 그런 거 애초에 바라지도 않음. 그리고 너가 그런 거 살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조그만 방에서 이러고 살고 있지 않겠지."
"....."
혜정의 적막에 홍주는 민망해졌다. 농담이었는데 좀 심했나.
민망함에 고개를 돌린 홍주의 시선에 문득 옷장이 들어왔다.
".......야."
"왜?"
"...우리..저걸로 한 번 해볼래?"
"뭘?"
"시계를 불러봐."
"그게 무슨..."
"시계를 불러내 보라고. 옷장으로"
"....어떻게?"
"...그건 뭐...글쎄. 네가 해봐야지. 나 불러내는 것처럼 해봐. 얼른! 얼른 해봐!"
홍주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니 혜정도 덩달아 설렜다. 혜정이 사랑하는 홍주의 눈빛이었다. 어떻게든 부응해주고 싶은데, 방법을 몰랐다.
일단 눈을 감고, 시계를 생각했다. 그리고 5,4,3,2,1.
"왔을까?"
"모르겠어. 지금 너 불러낼 때처럼 생각하고 5초 세기는 했는데."
"가 보자"
홍주는 아이처럼 신나서 옷장 앞으로 뛰어갔다.
"나 떨려."
홍주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다.
'그에게 계속 이런 기쁨을 주고 싶다.'
혜정은 간절히 생각하며 옷장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홍주는 잠시나마 시계가 옷장으로 진짜 오지 않을까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애초에 그게 되면 혜정은 부자로 살고 있었겠지.
홍주의 풀죽은 얼굴을 바라보자니 혜정도 마음이 안 좋았다.
"나 오늘은 그냥 갈란다. 술맛도 없고. 운동이나 가야지"
홍주는 오늘은 영 일이 안 풀리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스케줄 갈 때도 기분 나빴는데, 괜히 여기서도 스트레스를 풀기는 커녕 혜정 때문에 눈치 보며 스트레스만 쌓였다.
간다는 말에 혜정은 애가 탔지만 잡을 수는 없었다. 홍주를 잡을 만한 구실이 없었다.
그저, 벌써 일어나 옷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홍주의 넓은 등짝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 간다"
홍주가 문을 닫고 들어갔다.
옷장을 바라보던 혜정의 눈 앞이 점점 흐려졌다. 눈 주변이 뜨거워졌다. 이윽고, 혜정의 뺨 위로 또르르 눈물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