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이 홍주를 그렇게 돌려 보냈던 게 벌써 열흘 전이다.
혜정과 홍주가 옷장을 통해 만나기 시작한 이래로 이렇게 오랫동안 못 본 적은 없었다. 순간이동이 가능하니까 밤 늦게 잠깐이라도 보곤 했는데 요즘은 혜정이 메시지를 보내도 홍주가 늦게 봐서 못 만나는 날이 더 많았다.
홍주는 유튜브 알고리즘 덕에 스케줄이 많아졌다고 했다. 실제로 TV에도 자주 출연했다. 아니면 설마 밤에 만나는 다른 여자라도 생긴 건가. 이렇게 생각하니 혜정은 서글퍼졌다. 애초에 홍주와 혜정은 서로의 주소도 몰랐다. 둘의 만남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겹쳐지는 인맥도 없다. 둘이 끝낸다 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그렇게 아무 의미 없이 즐기는 관계였구나.'
5,4,3,2,1
아무때나 불러내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오늘은 그냥 한 번 불러내보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옷장 문을 열어보았지만 홍주는 없었다.
'저기에 있던 홍주를 내가 불러낸 거구나'
TV 속에는 집에서 운동하는 홍주의 모습이 보였다. 스타의 집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섭외됐다고 되게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홍주의 집은 혜정의 집과 비교도 안 되게 좋아 보였다. 매일 스케줄 없다고 징징대더니, 그간 그래도 아이돌 생활하면서 벌어들인 돈이 꽤 됐나 보다.
이 만남이 혜정은 슬슬 허무하게 느껴졌다. 2년이 지났다.
홍주에게 모든 것을 오픈하고, 바깥에서 데이트도 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연애도 해보고 싶어졌다. 인스타그램 dm으로만 이어지는 실체 없는 연락도 더 이상 부질없게 느껴지고 있었다. 처음에 혜정은 핸드폰 번호라도 교환하면 홍주가 어찌저찌 주소를 알아낼까 싶어 번호 교환을 하지 않았다. 엄마의 죽음을 본 이후, 혜정이 자신만의 규칙으로 세운 거였다. 그래서 그간 몇 번 홍주가 전화번호를 물어 보았지만 단호히 거절했었다. 오직 연락은 혜정의 인스타그램 유령 계정으로만 이루어졌다. 그런데, 요즘은 후회됐다. 알려줄 걸. 못 이기는 척 알려줄 걸. 그럼 서로간의 거리감이 좀 덜 하지 않았을까.
2년 전, 혜정은 엄마처럼 옷장에 의존하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혜정은 그 반대다. 옷장에 의존하고, 옷장을 통한 만남을 매일매일 기대하고 있다. 아마 엄마도 그랬겠지.. 엄마도 임동식과 옷장으로 만나는 게 허무해졌겠지. 그러니까 30년간 참아 왔던 금기를 깨고 그에게 작은 방 덧문을 열어줬던 거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엄마가 참 불쌍했다. 무려 30년 동안이나 정상적인 사랑이라고는 하지 못 했던 엄마가 참 딱했다.
이제 그만해야 하나...
사실, 혜정은 홍주와 어차피 연인이랄 것도 아니었으니, 그만할 것도 없었다. 눈치만 봤지, 제대로 관계 정립을 하자고 이야기한 적도 없지 않은가. TV를 통해 바라보는 홍주는 혜정에게 멀기만 한 사람인데, 혜정은 자꾸만 마음을 제어하기 힘들어졌다.
혜정은 이 대리를 좋아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 때도 고백 한 번 못 한 채, 혼자 마음 정리를 했었다. 혜정은 그런 사람이었다. 상처 받을까봐 시작도 못 하는 사람, 고백했다 차일까봐 이야기도 못 꺼내는 사람. 어릴 적 동네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상처받았던 기억 때문인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건 혜정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혜정은 이번에도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상처 받을테니 그냥 시작도 말고 바라지도 말자. 그냥 지금처럼 필요할 때 서로 즐기기만 하자.'
혜정은 쓰고 있던 메시지를 바라 보다가 그대로 취소하기 버튼을 눌렀다.
"나 너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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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홍주는 마스크를 끼며 스태프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갑자기 떴다고 건방져졌다든지, 이런 뒷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온 기회인데!! 신인의 자세로 열심히 한다는 미담을 듣고 싶었다. 홍주에게 다시 한 번 찾아온 이 기회를 절대 날려버릴 수 없었다. 영앤리치.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홍주는 지하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밴에 몸을 실었다. 올라간 인기만큼 밴의 덩치도 커졌다.
"형 고생하셨어요. 요즘 개인 스케줄 너무 많아서 힘드시죠?"
"어..어 아냐 야. 이럴 때 열심히 해야지. 나 몇 년간 한가했잖아. 물 들어올 때 열심히 해야지."
"크크 맞아요 형. 형 이제까지 열심히 하셨으니까 이렇게 빛도 보시는 거예요"
"야야 됐어. 운전이나 해. 아오 피곤하다"
"집에 가실거죠?"
"응. 내일은 스케줄 뭐 있지?"
"아 내일은 아침에 송한이 형이랑 하나, 그룹으로 하나 유튜브 인터뷰 2건 잡혔어요."
"송한이랑?"
"네."
"아이씨, 걔랑은 왜? 걔는 이미 인기 많잖아. 나 좀 뜬다고 묻어가려고 하냐."
"하하. 그러게요. 송한이 형이 그 언론사 대표들이랑 좀 친해요. 형 인터뷰 잡혔다니까 형 혼자서 인터뷰 많이 안 해봐서 어색할 거라고 같이 해준다고, 스케줄 뺀다고 하던데. 아까 저한테 그래서 전화도 왔어요."
"와..진짜 예나 지금이나 재수없긴 마찬가지네."
"형도 송한이 형 인기 이용해서 조회수 좀 빼먹고 좋죠 뭐"
"야, 너도 아직 나 혼자는 무리라 이거냐."
"아..아니죠. 그래도 둘이 하면 조회수 배로 나올 테니까 더 좋을 거 아녜요"
"됐다 됐어. 말을 말자. 내일 아침부터 그 재수없는 얼굴 봐야한다니 기분 잡치네"
"에이 좋게 생각하세요 형. 좀 주무세요. 집 도착하면 깨워드릴게요"
홍주는 안대를 꼈다. 분했다. 이렇게 기분이 나빠지는 것조차 분했다. 분하다는 건 홍주 혼자로는 아직 부족하다는 걸 홍주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는 말이니까. 착한 척, 배려해주는 척 자기 실속이나 챙기는 송한이 얄미웠다.
'욕심 많은 놈'
홍주는 내렸던 안대를 올리고, 핸드폰을 꺼냈다. 생각보다 광고 촬영이 늦게 끝났다. 벌써 새벽 1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인스타그램을 켰다.
@hyejeonggggg
이따 30분 후, 콜?
너무 피곤했지만, 요즘 통 못 봐서 그런지 조금 허전하긴 했다. 못 본 동안 업데이트할 이야기가 많았다. 비밀 유지 되는 혜정에게 광고 찍은 거 자랑도 좀 하고, 내일 인터뷰하기 전에 입도 좀 풀어야 겠다 싶었다. 덤으로 짜증나는 송한에 대해 실컷 욕하고 싶었다. 그러다 체력이 되면 그것도 하고. 좀 늦은 시각인가 싶었지만, 어차피 집에 가도 바로 잠들 것 같지는 않았다. 혜정도 홍주가 요즘 바쁜 걸 아니까 이해해주겠지. 무엇보다, 옷장으로 가면 순간이동할 수 있으니까 잠깐, 빠르게 만나서 스트레스만 풀고 집에 돌아가면 되지 싶었다.
'흠..자나?'
dm을 보낸지 10분이 지났는데 혜정은 답장이 없었다.
보통 이런 적은 없었다. 언제 보내든 혜정은 5분 대기조처럼 답장했다. 마치 홍주의 연락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메시지를 보내기 무섭게 답장이 왔었다. 요즘 그래서일까. 옷장을 가진 건 혜정이지만, 관계의 주도권을 가진 건 홍주 자신이라는 생각이 드는 참이었다. 혜정은 홍주가 보자고 하면 언제나 알겠다고 했다. 드물게 혜정이 보자고 물을 때, 홍주는 스케줄이나 다른 약속 때문에 거절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혜정은 진짜 언제나 오케이였다.
'얘는 친구도 없나'
홍주는 언제나 만남을 허락하는 혜정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래서 솔직히 참 쉽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혜정한테는 다 쉬웠다. 만났던 여자들 중 손에 꼽게 혜정은 쉬운 여자였다. 더구나 여느 여자들처럼 홍주에게 우리 어떤 관계냐고 만날 때마다 추궁하지도 않았다. 홍주는 혜정과의 이런 관계가 좋았다. 그래서 아직까지 서로 번호도 모르지만 답답함 같은 것도 모르고 살았다. 필요할 때마다 언제나 재깍재깍 대답해줬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메시지는 안 읽은 상태 그대로였다. 아무리 늦은 시각이어도 연락이 안 됐던 때는 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