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 엄마는 도둑질이나 하면서 밥 벌어먹던..."
!!!
혜정은 머리를 띵 맞은 느낌이었다.
어렸을 적, 아빠도 없고 규모도 작은 회사에 다니던 엄마가 잘 사는 동네에서, 다른 친구들 못지 않게 혜정이 원하는 건 대부분 다 사줄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아니지...사줄 수 있던 게 아니고 가져다줄 수 있었던 건가...'
"혜정씨? 혜정씨? 듣고 있어요?"
"...아..네. 듣고 너무 놀라워서..."
"하나도 모르고 계셨던...건가요?"
"네...전혀요. 저는 그동안 엄마가 그저 절 부족함 없이 키워준 것만 생각했지,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어렸거든요."
"뭐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모를 수 있었죠. 하지만 혜정 씨가 성인이 된지 자그마치 10년이나 지났습니다. 그 당시에도 몰랐나요? 어머님이 임동식 씨 이야기하면서 절도라든지 이런 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없어요. 만약 저희 엄마가 거기에 진짜 연루됐다고 하더라도...자기 딸에게 엄마가 도둑질해서 너 먹을 거, 입을 거 해결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아...네...없겠죠."
"전 진짜 몰라요"
"혹시...뭐 짚이거나 아시는 건 전혀 없으신거죠?"
"네..아무래도. 이 이야기도 형사님께 처음 들어요"
"그렇군요..."
"형사님. 이런 이야기 하시는 이유가 뭐죠? 전 도난이니 분실이니 진짜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그리고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인데요"
"..."
"네? 저희 엄마가 죽은 거랑 지금 말씀하시는 거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고요"
"그냥 수사를 위해 여러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 뿐입니다"
"네?"
"어머님 사건은 아직 들여다볼 게 많아요. 그날 그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아직 속 시원히 해결된 것도 아니고..."
"...절 의심하시는 건가요?"
이 형사는 말 끝을 흐렸다. 분명, 이미 종결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사건의 재수사를 위해서는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어야 한다고 혜정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혜정도 넓은 의미에서 여전히 이 형사에게는 용의자였다. 증거가 불충분할 뿐. 그렇기 때문에 절도 건을 빌미로 그날의 진실에 대한 증거 수집이 필요했다.
통화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혜정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 대리는 아까 형사는 업무 시간에 누구랑 통화를 그렇게 오래 했냐고 혜정을 채근하려다 혜정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혜정은 책상 위 가방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취직 선물로 준 샤넬백이었다.
이제까지는 당연히 엄마가 선물로 사준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산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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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는 오늘 스케줄을 무사히 잘 마쳤다. 가기 전까지는 혹시라도 송한이 홍주를 봤을까 싶어 엄청 걱정됐었는데, 다행히 송한은 눈치채지 못 한 것 같았다.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 전화까지 왔으니 문제는 이제 해결된 것 같았다. 홍주가 DJ와 스태프들에게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부스에 있던 라디오 PD 이정민이 헤드셋을 벗으며 뛰어 나왔다.
"홍주 씨. 오늘 너무 고생 많았어요"
"아...네. 감독님도요. 오늘 또 불러주셔서 감사해요"
"에이, 감독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난 감독, 감독 이러면 늙수그레 50대 아저씨 생각나. 그리고 홍주 씨가 잘해서 그런 걸."
"하하...네 PD님. 죄송해요. 어렸을 때부터 현장에서 하도 감독님 감독님 이러고 다니니까 입에 붙어서..."
"하하. 그럴 수도 있겠다. 홍주 씨도 데뷔한지 이제 좀 됐잖아, 그죠?"
"아...뭐 좀 그렇죠."
"저...그런데...오늘 뭐 하는 거 있어요?"
이정민 PD가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홍주에게 물었다.
"오늘요?"
"네. 이거 끝나고 혹시 스케줄 뭐 있나 해서."
"어...제가 알기로는 없어요"
그녀는 유튜브로 홍주의 주가가 오르기 막 시작했을 때, 그를 그녀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시켰다. 그때 그를 눈여겨 봤던지 다시 한 번 불러주겠다고 그 때 약속했었는데, 정말 다시 불러주었다. 친해져서 나쁠 게 없는 인물이었다. 오히려 좋은 거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와 인스타그램 맞팔로워가 된 후부터, 그의 게시물마다 좋아요를 눌러주고 댓글을 달아주는 등 적극적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홍주에게 호감이 있는 눈치였다. 사실,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한 미녀 PD에다가 학벌도 좋은 그녀가 홍주에게 다가온다? 솔직히 홍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혜정이 걸리긴 했지만.
"그럼 우리 오늘 저녁 같이 해요"
"네?"
"홍주 씨, 목요일 코너 아예 고정으로 넣으면 어떨까 해서요, 오늘처럼. 요즘 너무 잘 나가니까 다른 라디오에서 데려가기 전에 내가 선점하려고"
"와! 진짜요?"
"네. 그리고 그러려면 우리 좀 친해지는 게 좋잖아요. 여기 방송국 앞에 훠궈 잘 하는 데 아는데. 혹시 잘 먹어요?"
"좋아하죠. 없어서 못 먹죠"
"그럼, 가요 우리"
이 PD가 홍주의 팔에 슬쩍 밀착했다. 그녀의 상체가 그의 팔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꼴깍.
오랜만에 느껴지는 설렘이었다.
마침 그때,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잠시만요"
수신인을 확인해 보니 혜정이었다. 이제 dm이 아니고, 전화였다. 아마도 혜정은 퇴근 후 집에 와서 홍주의 라디오를 듣다가, 끝나는 걸 확인하고 바로 걸었던 거겠지. 보지 않아도 혜정이 어떻게 했을지 눈 앞에 그려졌다. 홍주는 순간 고민되었다. 혜정이랑 사귀기로 한지 며칠 안 됐고, 얼마 전 혜정 덕을 크게 보기도 했다.
하지만, 눈 앞의 PD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홍주는 다시 한 번 이정민의 얼굴을 보았다. 이정민의 발그레한 미소가 보였다.
'그래. 시계도 가져다 놨고, 일단 급한 불은 껐잖아.'
홍주는 휴대폰 화면에서 '회의 중입니다' 버튼을 눌러 수신을 종료시켰다.
이정민이 홍주의 팔을 잡아 끌었다. 둘은 방송국 앞 훠궈집으로 향했다.
작은 훠궈집은 저녁시간이 조금 지나 사람들이 한 차례 빠져 나갔는지 한산했다.
어두운 가게 안, 살짝 어두운 주황빛 조명 아래 둘의 대화도 무르익었다. 차가운 생맥주와 뜨끈하고 매콤한 훠궈 국물. 합이 좋았다. 음식도, 대화도. 가게 안 잔잔한 음악까지 점점 취해 들었다.
"야! 이거 누구야. 홍주야!"
둘 만의 세상에, 분위기에 빠져들고 있던 홍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송한이었다. 옆에는 송한의 매니저도 함께였다.
"우리 매니저가 여기 훠궈 포장해 가려고 딱 기다리고 있는데, 네가 있다고 해서 내가 차에 있다가 바로 달려나왔지! 어이쿠. 우리 이 피디님도 함께 계셨네요?"
"어머 송한 씨"
송한은 이정민 PD와도 구면인 듯 했다.
'저 자식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없네.'
그간 송한은 스케줄도 풀로, 인맥 관리도 풀로 철저하게 관리해왔나 보다. 방송국 도처에 그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뭐야. 두 분? 데이트? 그렇고 그런 사이?"
"아냐, 송한 씨. 우리 라디오에 홍주 씨 고정해 달라고 청탁하는 자리였어. 크크"
"에이. 내가 쓰윽 보니까 그런 담백한 분위기가 아니던데?"
"야! 아니야."
홍주가 자기도 모르게 오버해서 큰소리로 말했다. 혜정이 조금 걸린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이정민을 향해 생겨버린 홍주의 호감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호감을 들켜버려 이정민과 괜히 어색한 관계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어머 홍주 씨. 서운하다. 나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게 그렇게 싫은 거예요?"
정민이 장난스럽게 울상을 지었다. 조명 아래, 취기가 올라 조금은 붉어진 정민의 얼굴. 정민은 자신의 매력 어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여자인게 분명했다. 홍주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부끄러움인지, 살짝 올라온 취기 때문인지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송한이 그런 둘을 바라보고는 홍주에게 귓속말로 나지막이 말했다.
"잘해봐. 이 피디 인기 많아."
"..."
"나 간다. 그리고 홍주야 진짜 미안했다. 피디님. 다음에 방송에서 봐요"
"네. 가세요 송한 씨"
송한과 매니저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민이 홍주에게 물었다.
"그런데 뭐가 미안해요? 싸웠어 둘이?"
"아니, 그런 게 있었어요. 우리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홍주는 이 자리에서까지 송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둘 만의 시간이 다시 한 번 무르익고 있었다.
"라면...먹고 갈래요?"
정민의 말 한마디가 홍주의 폐부를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