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와 혜정이 마주 앉았다.
어제 연락이 안 됐던 것 때문에 미안했던 홍주가 오늘은 혜정의 퇴근 시간에 맞춰 불러달라고 했다.
정민과 시간을 보내느라 연락이 안 됐던 거에 대해서는 적당히 둘러댈 계획이었다.
한편, 혜정도 오늘 홍주에게 줄 게 있었다. 시계였다.
어젯밤 한바탕 소동 후 시계를 발견했던 혜정은 그 번호로 문자 메시지를 보냈었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 그냥 별 생각 없이 해 본 것이었다.
"누구시죠"
당연히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답장이 왔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당신을 도울 뿐입니다"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다행히 혜정의 집 안에 없어진 물건은 없는 것 같았다. 도둑 같은 건 아니었던 걸까. 정말로 혜정을 순수하게 돕는 사람? 그렇다 할지라도 그 문자 메시지의 인물이 혜정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건 여전히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혜정은 그 사람이 필요할 때 쓰라며 줬던 까르띠에 시계를 중고샵에 팔아 버릴까, 경찰에 신고할까 고민했다. 하지만...솔직히 탐이 났다. 1200만 원 짜리였다. 무엇보다 홍주가 진짜 갖고 싶어했던 물건이었다. 회사에서 내내 고민하던 혜정은 결국 홍주에게 그걸 선물로 주기로 했다. 어차피 문자 메시지도 혜정에게 필요할 때 쓰라고 했었다.
"미안, 어제는 많이 걱정했지"
홍주가 혜정을 살폈다. 화라도 났으면 어떡하나, 의심이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지만, 생각보다 혜정은 담담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회의가 길어졌나봐"
"응. 미안. 새로 라디오 고정 들어가게 됐거든. 그 쪽 팀이랑 회식했어"
"잘됐네."
"응. 잘됐지? 하하"
홍주가 민망한 듯 웃었다. 그때 혜정이 뒤에 숨기고 있던 무언가를 내밀었다.
"잘됐다. 이거 라디오 고정 선물로 주면 되겠네"
"뭔데 이게?"
"꺼내봐"
까르띠에였다! 홍주가 가지고 싶다고 피드에 올려놨던 바로 그 시계.
"혜..혜정아!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이걸 샀어?"
"음...그건 알 거 없고. 어때? 맘에 들어? 한 번 차봐"
"정말...정말 내가 이걸 받아도 되는 거야?"
"당연히 되지. 애인한테 선물 주는 건데 문제 될 건 없잖아"
홍주의 얼굴이 기쁨으로 해사하게 빛났다. 바로 그, 혜정이 가장 좋아하는 홍주의 얼굴. 평소에도 이 얼굴을 많이 많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나 너무 좋아. 진짜 고마워 혜정아!"
홍주는 혜정의 얼굴에 뽀뽀를 퍼부었다. 그야말로 애교가 절로 나오게 되는 선물이었다. 그 누구라도 1200만 원짜리 선물을 받게 된다면 그럴 테지만.
혜정은 누가 준 것인지 계속 신경쓰였지만, 그래도 홍주에게 이 시계를 선물로 주길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정에게 이 물건은 홍주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필요했다. 홍주의 미소를 보고, 사랑을 받기 위해 필요했다. 혜정은 그저 문자 메시지가 말했던 것처럼, 필요할 때 쓴 것 뿐이었다. 혜정은 찝찝함을 지우기 위해 계속 자기 합리화했다.
"나 곧 있으면 우리 컴백 때문에 신곡 녹음하거든. 그 때 송한이도 만나는데 보란듯이 차고 가서 자랑할게. 스케줄 때도 매일매일 찰거야"
"그래. 꼭 차고 가서 코를 납작하게 눌러줘"
"알았어. 혜정아. 진짜, 진짜, 지이이인짜 너무 고마워"
홍주는 진짜 스케줄에 갈 때마다 시계를 찼다. 송한에게 들킬까봐 후드티 소매를 내려 가리기 급급했던 그 때와는 달랐다. 가급적 시계가 잘 보이게끔 손목을 드러내 놓고 다녔다. 시계 하나로 몸값까지 한 등급 높아진 느낌이었다.
갖고 싶었던 걸 가진 느낌! 짜릿했다.
"야, 이거 진짜 비싼 거 아니야?"
목요일, 녹음실에서 만난 멤버 민수가 홍주의 손목을 보더니 알은체했다.
역시 오지랖 넓은 민수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오지랖을 대환영했다. 마구마구 소문내 줬으면 하는 기분이었다.
"어...에이...별거 아니야"
홍주가 은근슬쩍 소매를 걷었다. 민수의 말에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홍주의 손목 시계로 향했다. 물론, 송한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그 송한이 거보다 비싼 거 같다? 다이아도 쬐깐하게 박히고?"
"야야 그러지마. 송한이 거도 비싼 거야"
홍주는 슬쩍 송한의 얼굴을 보았다. 살짝 송한의 동공이 흔들린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진 것 같기도 했다.
"뭐, 광고 찍더니 계약금 받자마자 샀나 보구만. 비싼 거 샀네"
송한은 별거 아닌 듯 말했지만, 홍주는 그의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묻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관심사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가는 일은 아마 송한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일테지. 일이 있다며, 송한은 서둘러 먼저 일어났다.
홍주는 아주 오랜만에 통쾌하고 즐거웠다.
'혜정아 고마워'
홍주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파트 녹음을 마치고 홍주도 다음 스케줄 때문에 일어났다.
지이잉
"곧 만나^^"
이정민 PD의 문자 메시지였다.
강렬했던 그 날 이후,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몸도, 마음도 잘 통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정말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래서...얼마 전부터 그녀와 만나기로 했다. 그녀를 향한 홍주의 마음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홍주는 요즘 그녀의 라디오에 출연하는 목요일이 가장 기다려졌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스케줄에 신곡 연습까지 일이 많아져서 평소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목요일은 일을 핑계로라도 만날 수 있었다. 매니저 수현과 잘 이야기해 목요일 밤은 웬만해서는 스케줄을 빼놓았다. 회사와 주변 사람들에게는 비밀이었다. 멤버들도 몰랐다. 그녀와의 데이트는 방송국 주변에서 만나 홍주의 집 근처 호텔로 가는 코스였다. 주로 방송국 지하 주차장에서 매니저가 홍주와 정민을 밴에 태워서 움직였다. 그녀와의 만남이 밖에 새어나가지 못 하도록 홍주는 철통 보안에 힘썼다. 수현이 많이 도와줬다. 요즘 그 때문에 홍주는 수현과도 부쩍 사이가 좋아졌다.
혜정...혜정도 만나긴 했다.
혜정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녀는 연락만 하면 언제든 볼 수 있었다. 만나자고 약속만 하면 틈날 때 매니저의 도움 없이도 순간이동으로 그녀의 집에 갈 수 있었으니까. 혜정은 그만큼 홍주에게 너무나 손쉬운 존재였다.
혜정이 가끔은 바깥에서도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지만 홍주가 거절했다. 요즘처럼 중요한 시기에 열애설 같은 게 터지면 골치 아파질 수 있으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부탁했다. 이번 컴백 무대 때문에라도 지금은 자중해야할 때라고 말했다.
대신, 홍주는 시계가 일부러 보이게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여러 장 올려, 널 향한 마음을 은근히 티내는 거라고 혜정을 다독였다. 혜정은 아쉬워했지만, 언제나처럼 알겠다며 넘어가줬다.
분명, 혜정을 향한 홍주의 죄책감은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정민을 향한 마음도 커지고 있었다.
홍주는 오늘도 라디오를 마친 후 정민과 지하주차장 밴에서 만났다.
"내꺼 손 잡고 싶어서 혼났잖아."
애교 섞인 정민의 말투에 홍주도 미소지었다. 정민이 상체를 홍주에게 바짝 밀착시켰다. 운전석의 수현만 아니면 당장이라도 정민을 안고 싶었지만, 참았다.
"형 고생하셨어요"
수현이 앞만 보고 모르는 척, 운전대를 잡았다.
"오늘도 거기로 가면 될까요?"
"응. 그래. 너는 거기서 바로 퇴근해."
"이따가는 어떻게 가시게요?"
"그냥. 내가 알아서 갈게. 따로 택시 불러서 가든가 난 걸어가도 돼. 우리 집 근처잖아"
"네"
매니저 수현의 역할이 컸다. 요즘 사랑의 오작교를 제대로 하고 있었다. 덕분에 홍주는 바쁜 스케줄 틈틈이 달콤한 일상을 누릴 수 있었다. 매번 찾던 청담 R호텔에 다다르자, 언제나 그랬듯 정민이 체크인하고 먼저 올라갔다. 홍주는 사람들 눈을 피해 시간 차를 두고 올라가고자 밴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지이잉
"2601호 올라와"
정민의 문자 메시지였다. 홍주는 뛰어내리듯 밴에서 내려 엘레베이터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올라가서 정민을 안을 생각 뿐이었다.
띵동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다. 홍주는 사람들이 알아볼까 싶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누군가 홍주의 어깨를 툭 쳤다. 홍주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 맞네?"
송한이었다. 송한의 매니저 한식과 저번에 함께 유튜브 인터뷰를 했던 이 PD도 함께였다.
"홍주! 또 보네! 어디 가?"
"아...어...저기 오늘 여기서 미팅있어"
"아 그래? 뭐 프로그램 들어가 또?"
"홍주 씨 요즘 잘 나가네요 진짜! 저희 채널에도 한 번 더 나와주세요! 저희 그때 조회수도 진짜 잘 나왔던 거 아시죠?"
"아...뭐"
송한 옆에 있던 이 PD가 끼어들었다.
"아! 홍주야. 너 혹시 이정민 PD랑 미팅이야? 아까 저기 로비 쪽에서 만났는데 우리."
홍주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