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잊지 못해
“둘이 언제부터야?”
선영이 참외를 깎던 손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이번 주부턴가? 아니, 저번 주부터였나?”
지연이 버져 누르길 머뭇거리는 퀴즈쇼 참가자처럼,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같은 팀원인 나에게 정답을 요구하듯 힐끔 눈치를 준다. 나는 어쩐지 머뭇거리며 담배를 비벼 끄는 그에게 질책하는 눈빛을 보낸다.
‘속도 없이 뭘 잘난 척하면서 떠벌리는 거야.’ 내가 눈으로 지연에게 말하자, ‘숨길 일도 아니잖아?’라고 그가 반문한다.
“그럼 우리는 이제 끝이네? 안나가 아무리 지장보살 뺨치게 관대해도 허락해 주진 않을 거 아냐?”
나는 선영의 영문 모를 소리에 주위 얼굴들을 두리번거리며 해석을 요구해 보지만, 모두들 하나같이 난처한 표정으로 선영을 제지하기 바쁘다. 하원은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힘껏 누르며 바람 빠지는 쉿소리를 내고, 성민은 만면에 짜증을 실어 구겨진 표정을 짓는다.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로난만이 길게 목을 빼고 나와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내가 더 깜짝이야. 지연이랑 나랑 섹스파트너인 거 아직 모르는 사람도 있어?”
선영이 과일을 깎는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내리며 짓궂게 미소 짓는다. 그 옆에서 껍질 벗고 줄 맞춰 누워있는 과일들 중 하나를 포크에 꽂아 야금거리는 지연이 선영과 한 팀으로 보여 꼬집어버리고 싶을 만큼 얄밉다.
6월에 들어서고 텔레비전 뉴스에서 점점 장마 예보를 내보내기 시작했을 때, “방학 땐 우리 집으로 들어오지 그래?”라고 그가 물었다.
“학기 중엔 통학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방학 땐 그럴 필요 없잖아. 어차피 우리 매일 붙어있을 텐데.”하며 효율성을 쫓아 당위성을 만족시키는 지연이었다.
나는 그의 주장을 기각할 의욕이 생겨나지 않아 “맞아……. 그게 편하겠지?” 하고 동의했다. 하지만 ‘실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으나…….’하고 어리둥절하였다.
하필이면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되는 날에 선약이 있어 불가피하게 외출해야 한다. 쏟아지는 장대비가 도시의 회색 빌딩과 겹쳐져, 먹구름이 하늘에서 분리되어 뚝뚝 떨어지는 착시를 일게 한다. 6개월 만에 내 핸드폰 액정을 노크한 지원은 평온한 목소리로 대면을 요청했다.
역시 6개월 만에 방문하는 이 카페에 지원은 저번처럼 약속시간보다 먼저 나와 이번엔 창가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를 데려다주고 돌아가려는 지연의 모습을 놓치지 않은 그녀가 반갑게 손짓한다.
“둘이 무슨 사인데?” 지원의 입은 멈추었지만 그녀는 표정으로 '모리는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는다.
“에스코트일 뿐이에요. 비도 많이 오는데 데려다줄 애인도 없고 불쌍하잖아요. 누나는 괜한 의심 많은 게 단점이야.”
‘죄송해요’라고 말하려는 나보다 먼저 소리를 낸 지연의 입은 거짓말을 구사했다. 나는 내가 하려던 말을 삼키고 대신에 어색한 웃음 흘린다.
“그럼 다행이지만……. 그러고 보니 괘씸하네. 지연이 넌 왜 그냥 가려고 했니? 겸사겸사 얼굴도 보고, 얼마나 좋아. 고등학교 땐 우리 집에서 곧잘 자고 갔잖아. 내가 너 밥 차려준 게 몇 번인 줄 아니?”
“그땐 신세 많았습니다만, 이제는 철없는 어린애도 아니고 두 분이서 중요한 얘기하시는 자리에 제가 낄 수 있나요.”
지연이 두 손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내보인 뒤통수가 오늘따라 능글맞다.
“얘는, 내가 너한테 숨길게 뭐가 있겠니?”
지연과 내가 각각 주문한 아메리카노와 레몬에이드가 나오자 지원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늦었지만 사과할게요. 안나씨에겐 내가 실수했어요. 계속 신경 쓰였는데 막상 얼굴 마주 볼 용기는 안 나더라고요. 지연이가 얘기한 데로 내가 의심이 좀 많아요.”
“아니요. 저는 오히려 도움을 받았어요. 모리에 대해 너무 몰랐거든요.”
소량의 설탕에서 길게 뽑아져 나온 실이 돌돌 감겨 몇 배씩 부풀려진 솜사탕처럼, 낱낱의 단서들은 어느새 동그란 솜 모양으로 뭉쳐졌다. 지원이 기계 안으로 넣은 노란색 설탕이 빨간 솜사탕이 되었을 뿐이다. 그녀는 은혜가 나에게 사실을 가르쳐줄 계기를 선사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려주려고 보자고 했어요. 막내랑 일 년 다 돼가게 연락두절인 상태에 좀 무책임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한 달 일정으로 여름휴가 계획을 잡았거든요. 남편이랑 나, 두 살배기 딸, 주원이. 우리 네 명이서 LA 고모님 댁에 가기로 했어요. 원래 매년 여름휴가는 아버지와 모리까지 빠진 적 없이 담양에 있는 별장에서 했었는데, 이번에는 아버지 특별 지시가 있어서요. 모리 신경 쓰지 말고 쉬다 오라는, 갔다 오면 당신이 모리 녀석 꼭 잡아다 놓겠다는 다정한 말씀을 하셨죠.”
그녀가 ‘다 정 한’ 하고 발음에 강세를 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