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밤 아랫배가 아팠다
어느 밤 아랫배가 아팠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날이 갈수록 통증이 더 심해져 갔다. 생리통일까 해서 병원에 갔다. 성별이 없어졌다.
“무슨 중금속이나 환경호르몬의 영향일까요?”
의사 선생님에게 물었다.
“글쎄요.”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곤을 짊어진 축 처진 어깨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무기력하게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무심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불임판정을 받았고, 너는 성별을 잃었다니. 우리는 이제 부부라기보다, 앞으로의 인생에 전우가 된 거지.”
B가 말했다. 예상대로의 대사였다.
내가 20대 후반에 들어섰을 때, 나이 많고 독신인 남자들은 나를 엄마로 생각했다. 침착해 보였을까. 흔들림이 없어 보여 기대고 싶었을까. 나 같은 여자를 엄마로 두고 자란 남자들은 나이들 때까지 결혼을 못하는 것 같다.
남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강해 보이고 아무한테도 지기 싫어하면서, 어째서인지 나와 있으면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패턴이 반복되면서 나는 부담을 느꼈다. 처음에는 어떤 어리광이든지 받아줄 아량도 있었지만, 점점 힘에 부쳤던 것이다.
그들에게 엄마가 필요하듯 나도 아빠가 필요했지만, 그것을 내비칠 수가 없었다. 책임감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면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자기 자신이나 챙기시지.’하고 나 자신을 바보 취급하며 넘어갈 수 있지만, 그때는 좀 더 어렸고, 좀 더 착실했다. 내가 흔들리면 그들이 불안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우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아이처럼.
하지만 그들은 어른이었다. 외부 자극에 대한 방어기제 프로그래밍도 이미 튼튼하게 구축돼 있었다. 40대에 들어선 독신남 부류들은 그대로 혼자 늙어 죽을 것을 두려웠던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연령대의 남자들은 가지고 있는 아내나 한두 명의 아이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초조함이 그들을 불안하게 했다.
결혼생활은 그들의 생활 패턴에 맞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삶을 원하는지 저울질하고 있는 판에, 어리지만 그나마 어른스러워 보이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불안했기 때문에 나 같은 여자애에게 혹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 어린 여자는 그저 어린 여자일 뿐. 어린 여자는 점점 나이를 먹고 자신의 역할에 질려갔다. 그리고 나는 B를 만나 결혼했다. 웃음이 많고 시시한 남자라고 생각했고, 그의 그런 부분이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B를 만나게 될 무렵, 나는 사람들을 기계처럼 여겼다. 어떤 함수식을 입력하면 그에 맞는 하나의 답이 나올 거라고. 나에게는 그것이 상식적이었고 정상적인 흐름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기계가 아님은 당연하고, 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을 견뎌낼 수 없었다.
‘이것이 정답이 아닐 리가 없는데, 사람들은 어째서 틀림없이 눈에 보이는 결과를 알지 못하는 걸까. 정말 알지 못하는 것일까. 알지 못하는 체하는 것일까. 참, 어리석구나.’ 미스터리였다.
사람을 기계라고 착각한 것은, 당연하지만, 나의 어리석음이었다. 제마다의 속사정이 너무나도 깊고 다양하다. 그런 사정 하나하나가 모두 변수였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지는 예상대로 일 때도, 아닐 때도 있는 법이다.
B는 항상 나의 예상대로였다. 이런 반응을 하겠지, 하고 짓궂은 장난을 걸면 그는 반드시 그 반응을 보여줬다. 그런 면에서 B는 전형적인 사람이었지만, 그 전형적임이 나에게는 전혀 전형적이지 않았고 특별하기만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B가 씻고 거실로 나왔다. 오늘 B는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고 평소보다 늦게 돌아왔다. 술이 약한 체질인 B는 친구들을 만나면 얼굴이 빨개져서 집에 온다. 얼마나 마셨냐고 물어보면 항상 ‘맥주 한 잔’이라고 대답하고 씻으러 욕실로 들어간다.
나는 거실의 조도를 낮춘다. 그리고 부엌의 아일랜드 테이블에 서서 유리잔을 꺼내 위스키를 따르고 뜨거운 물을 섞는다. 여기에서는 거실의 전체가 보인다. B가 씻고 나오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머리에 수건을 올리고 목욕가운을 입은 B의 표정에는 그날그날의 분위기가 묻어있다.
개운함, 지침, 들뜸, 복잡함 등의 감정이 이런저런 뉘앙스로 떠오른다. 날마다 표정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B를 대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나는 여기에 서있다.
“참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분명 나쁜 일이 맞긴 한데, 단편적으로 보면 이보다 더 나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나쁜 일이 맞기는 한데 말이지.”
B가 소파에 앉아 내 쪽을 바라보고 말했다. 두 손은 모아 양 무릎 사이에 끼운 채 가지런히 앉아있다.
“오늘 날씨가 좀 춥지 않았어? 모처럼 꽃들이 봉우리를 틔우나 했는데, 하루 걸러 다시 쌀쌀해지다니. 이래서야 아직 봄이라고 할 수도 없겠어.”
나는 핫위스키에 레몬 조각을 띠우고 그에게로 갔다. 공연히 날씨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오늘 병원으로 향할 때부터 쭉 ‘꽃들이 다시 들어가겠네. 들어가겠네.’하는 걱정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응. 꽃들이 말이지……. 그것보다 아랫배 통증은 괜찮아졌어?”
B가 소파에 기대고 있었던 등을 곧추세워 맞은편 바닥에 앉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진통제는 먹었는데, 아랫배가 뭉친 느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네.”
“아, 그래? 내가 좀 문질러줘 볼까?”
“응. 이따가 부탁해.”
B가 핫위스키를 홀짝거린다. B는 이 시간을 좋아한다. 일을 마치고 어두워진 창밖 풍경을 보며 물 탄 위스키를 마시는 시간.
막 결혼하고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 술을 못 마시는 그를 위해 위스키에 물을 타며 마치 내가 아이에게 물에 씻은 김치를 주는 엄마가 된 것 같았다.
어느 날 하루는 넋을 놓고 밖만 보고 있는 그에게 “내가 자리 비켜줄까?”라고 물어봤었다. B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는 작은 배려에서였다.
그는 같이 있는 게 좋다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