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가 먹고 싶어서

어느 밤 아랫배가 아팠다

by 새아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게 정해져 있던 것만 같아.”


“응. 그럴지도. 운명이란 게 말이야.” B는 무슨 말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아니야. 역시 그렇게 생각하면 좀 무섭고, 무거운 거 같아.”


나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것 또한 운명처럼 느껴져 무서워졌다.





여자 혼자 외출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구부정하게 걷는다. 남자처럼 보인다면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주머니 속 자동차 키를 만지작거리며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진짜 아무도 없는 걸까. 늘어선 가로등 뒤나 자동차 사이사이를 유심히 보았다. 나를 향한 눈은 없는 것 같았다.


한시도 안심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때 가로등 불빛으로 땅에 비친 나방의 그림자가 너무 커서 하늘로 새가 날아가는 줄 알았다. 괜스레 깜짝 놀란 나는 재빨리 차 키 버튼을 눌렀다. ‘삐’하는 소리가 나자마자 문을 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음에도, 무엇이 불안한지 차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리고 싶었다.


“A야.” B가 나를 불렀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깜짝이야. 발소리도 없이…….” 나도 모르게 날 선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별것 아닌 것에도 깜짝 놀란다는 건 B도 잘 알고 있었다.

“미안. 창문을 열고 바깥공기 좀 쐬다가 A가 나가는 게 보이기에, 그냥 보통처럼 걸어서 따라왔는데……. 내 신발이 소리가 안 나는 신발인가 봐.”


B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의 눈이 ‘근데 어디가?’라고 물었다.

“아침에 먹을 과일을 사 올까 해. 회사 주변에 무인 과일가게를 봐두었어. 퇴근하면서 들른다는 게 급하게 나오느라 못 갔거든.”


“나를 부르지 그랬어. 새벽에 혼자 위험하잖아.”


“자는 줄 알았어. 왜 안 자고 있었어?”


“자다가 깼어. 숙취가 좀 있어서 두통약 먹고 다시 자려던 참이었어.”


“지금은 좀 괜찮아?”


“약 먹었으니까 좀 있으면 나아질 거야. 일단 타자. 내가 운전할게.”


“내가 할게. 피곤하잖아. 옆에서 눈 붙이고 있어.”


“아냐. 괜찮아.”


B는 조수석 문을 열어 나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그의 말에 따라 조수석에 자리한 나는 그가 문을 닫아주길 기다렸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친 후 싱긋 웃어 보이더니 문을 닫았다.





시간은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무인 과일가게는 20분 정도의 거리다. B는 운전하며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중 특이한 아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B는 2년 전부터 대학에서 계약직 강사로 건축설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바나나가 없어.”


“응. 나도 오늘 사 오려다가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되겠다 싶어서 말았어. 주문하는 걸 깜빡했지만.” 그는 제자에 대한 말을 멈추고 나에게 대답한다.

바나나는 세척하고 자르고 할 필요 없이 간편하고, 물기도 없어 깔끔하게 먹을 수 있다. 우리는 요새 몇 달간 매일 아침으로 바나나를 먹고 있다. 근래 바나나가 떨어진 날은 없었다.

“바나나가 멸종하면 대체할 수 있는 과일이 뭐가 있을까?” 나는 바나나가 멸종하고 있다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껍질만 까면 먹을 수 있는 과일은 귤이 있는데, 맛을 대체할 수 있는 과일은 없지.”


“바나나도 성별이 있대.”


“바나나뿐만 아니라 지구상 번식하는 모든 종들은 성별이 있거나, 생명 주기 중 한때 성별이 있었지.”


“인간을 제외한 대다수의 종들은 자기 복제를 하잖아. 부모와 그 뒤 세대의 생김새나 쓰임새가 동일하잖아. 근데 인간은 동일한 개체가 없이 다 다르고. 불과 한 세대 만에 진화가 일어나기도 하는 거 같아”


“응. 유전자가 복잡해서 그래. 인간은 진화하기도 퇴보하기도 하는 것 같아. 자녀 세대에게 발현한 유전자가 그 시대와 맞지 않으면 퇴보한 것과 다름없으니까. 세상은 우리가 따라잡을 수 없이 빨리 변해.”


“내가 성별을 잃고 B가 번식할 수 없게 된 건 진화일까, 퇴보일까.”


“아, 나는 퇴보인 것 같고, A는 진화된 거 같아.”





무인 과일가게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밝고 하얀 조명 아래 여러 종류의 과일들이 방치된 듯 진열돼 있었다. B는 아직 초록색이 남아있는 바나나를 골라 들었다. 익지 않은 바나나가 당이 높지 않아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일부로 덜 익은 바나나를 사는 그였다. 나는 초록색 점이 생기기 전 바나나의 아삭한 식감이 좋았다.

B와 나는 다른 과일들도 사볼까 했지만 결국 바나나 한송이만 결제하고 가게를 나왔다. 내일 B는 오전 강의가 없어, 새벽까지 깨어 있는데도 부담이 없어 보였다. B는 아침잠이 많고 혈압이 낮아 오전 강의를 힘들어한다.

“아랫배는 괜찮아?” 운전하며 한동안 조용하던 B가 불현듯 물었다.

“불편한 느낌이 없어지지 않아.” 아랫배 통증 여부를 묻는 것이 당분간 우리 사이에 안부 인사가 될 것 같다.

“내일 대학병원에 검진 예약했어. 단순 검사로만 얘기해 놓긴 했는데 괜한 짓일까? 치료 방법도 없는데 시간 낭비일까 봐.”

“배 아픈 것 외에는 몸에 변화가 없으니 좀 더 두고 보자. 일시적인 걸 수도 있으니.”

“맞는 말이야.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예약 취소해야겠다.”

“이따가 수업 끝나고 저녁은 밖에서 먹을까?”

“좋아. French 식당 가자. 어때?”

“좋지. 나 집에 도착하면 같이 나가자.”


집에 도착하니 새벽 3시였다. B와 나는 각자의 방으로 향해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