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밤 아랫배가 아팠다
“학교에는 아직. A하고 상의 먼저해봐야 할 것 같아서. 시간이 좀 있으니까 학교에는 이번 학기 끝나고 이야기할까 해. 회사에서는 여름방학 들어가면 설계부터 시작해 달라고 했어.”
“응. 근데 여름방학 때부터면 2학기는 어떻게 시간을 낼 거야?
“2학기 때는 회사에서 출근일을 조정해 주기로 했어. 학교에는 사정 설명을 하면서 2학기 수업을 하나 줄이려고. 이번 프로젝트가 아직 우리 회사로 건축 업체 선정된 상태는 아니라 하반기에 결과가 나온다고 하고, 우리가 맡게 되면 본격적으로 바빠지는 건 이번 연도 말이 될 거야.”
“응? 그 프로젝트에 채택되지 않아도 회사에 계속 다닐 마음인거지?”
“응.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실제로 쓰일 공간을 만드는 일이 그리워.”
와인 한잔을 급하게 비우고, 이미 2잔째인 B의 눈빛이 술기운 때문인지, 일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유독 은은하게 빛난다.
“나도 찬성이야.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해.”
“그래? A가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다. 요즘 몸도 안 좋으니 반대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 B는 안색을 밝히며 미소 지었다.
“배가 조금 묵직한 것 제외하고는 달라진 건 없어. 몸에 이상한 변화가 생기면 말해줄게. 그전까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 아무튼 새로운 프로젝트 성공했으면 좋겠다. B가 즐겁게 일하는 모습 보고 싶어.”
B가 강의를 하기 전 다니던 건축사무소는 그의 대학교 선배 영일이 대표인 곳으로, B와 그 선배는 건축 철학과 취향이 잘 맞았다. 그 선배는 B에게 일과 삶, 전반에 걸쳐 좋은 영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 둘은 함께 일하며 얻는 것이 많았다. B는 선배에게 배우는 것이 많았고, 선배는 누구보다 자신을 따르고 열정적인 직원과 일하는 것이다.
“어떤 프로젝트야?”
“P시 공모전인데, 연구단지를 설립한대. 국내외 건축사 몇 군데에 설계 의뢰를 보내서, 그중에 1안을 선정할 거래. 외국 대형 건축사도 포함되어 있어서 우리 설계가 채택되기는 쉽지 않을 거야.”
“무슨 종류의 연구단지?”
“과학, IT 분야의 이공계 연구원들을 위한 설계인데, 연구소와 생활공간이 모두 있는 단지를 만들 계획이래.”
“대규모 프로젝트네. 곧 이 일에만 집중해야 되겠어.”
“사실 영일 선배에게 프로젝트 사업계획을 들은 후에 머릿속에 떠오른 청사진이 있어. 그 이미지를 도면으로 옮기고 실제 건축물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수 천 가지의 세부사항들이 있겠지만, 그 청사진을 구체화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느껴.”
“B가 의욕이 넘치는 걸 보니, 어떤 건축이 나올지 기대돼.”
B를 보고 있으니 미소가 나왔다. 그가 어떤 이미지를 구상하고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설명을 듣는다고 한들 그의 계획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진 않을 것이다. 그와 나는 사용하는 단어의 이미지가 달라서 같은 이야기에도 같은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저의 상태가 병명이 있는 건가요?” 성별에 대한 진단을 받은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의사 선생님이 직접 연락을 해 대학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병명이라고 할 것도 없이, 보고된 바가 없어요.”
“네, 잘 알겠어요.”
배의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생활에 영향을 줄 만큼은 아니다. 며칠에 한 번은 새벽에 욱신거리는 느낌에 잠에서 깨곤 하지만 진통제 2알이면 다시 잠에 들 수 있었다. B와 얘기했던 대로, 통증의 세기나 빈도가 악화되면 대학병원에 다시 검진 예약을 할 계획이었다.
편해진 변화도 있었다. 지난달부터 생리를 하지 않았고, 한 달에 며칠은 생리통으로 고생했는데 지금과 이전이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느꼈다.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괜한 걱정과 성별을 잃었다는 박탈감이 내 일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싫었다.
B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영일 선배를 만나기 시작했다. B의 학교와 영일의 사무실은 차로 10분 거리라, 시간이 될 때 카페에서 한 시간이라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일을 만난 후 집에 들어오면, B는 프로젝트에 관해 쉴 틈 없이 얘기했다.
“선배의 의견에 따르면, 식목들이 각 층의 테라스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현실적인 아이디어인지 잘 모르겠어. 난 테라스에서 울창한 숲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연구원들에겐 충분하다는 생각이야. 직접 식목을 관리하는 수고로움을 모두가 다 선호하진 않잖아.”
“재미있네. 영일 선배의 말대로 그건 각 세대의 선택이지 않을까. Private 정원을 빈 공간으로 나둬도 안 될 건 없잖아. 물론 프로젝트의 콘셉트가 ‘자연과 어우러진'이지만.”
“자연과 어우러진 공간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설계가 이 프로젝트에서 요구하는 주요 쟁점 중 하나지. 유지되어야만 해.”
“거주자들에 의해 자유롭게 변화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응. 나도 A와 같은 생각이야. 영일 선배는 변형이 가능한 설계보다도 변형이 필요 없는 아이디어를 찾고 있어.”
“어렵네.”
“응. 예산도 한정적이고.”
“예산이 문제지.”
“맞아. 미적으로 기술적으로 좋은 설계는 할 수 있어. 결국 실제 공간을 실현하는 건 돈이야.”
B에게 의사가 전화를 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는 영일과의 프로젝트와 학교와의 정리에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