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반느(Pavane). 16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느린 박자의 궁정 춤곡이다. 절제된 리듬 안에서 무용수들은 정해진 대형을 따라 잠시 같은 대형 안에 놓이지만, 음악이 끝나면 이탈은 필연이다.
경록과 미정, 그리고 요한이 함께한 시간은 그 춤의 시간으로도 볼 수 있겠다.
영화 '파반느'에서 이 제목은 영화의 구조이자 주제이며, 동시에 영화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영화의 형식적 선택은 처음부터 의도적이다. 영화는 경록의 부모 서사를 짧게 보여주며 시작한다. 광고처럼 매끄러운 장면들은 인위적으로 느껴질 만큼 세련되게 꾸며져 있다. 이 작위성은 사랑의 시작이 늘 그렇게 과잉되고 눈부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눈부심은 오래가지 않는다.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 사람은 남들과 다를 거라는 오해. 그리고 영원할 거라는 오해."
곧이어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요한의 독백이 나온다. 이 대사는 수미상관의 구조 안에서 전혀 다른 결을 가진다. 처음에는 경록의 부모가 나눴던 사랑을 무력화하는 냉소적인 시선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록과 미정의 이야기가 끝난 뒤 다시 들리는 이 대사는 ‘오해였기에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한 애틋한 애도로 변모한다. 관객이 인물과 함께 경험을 쌓은 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이 구조는, 관객들이 영화의 제목인 '파반느'의 무게를 느끼도록 유도한다.
모든 사랑이 오해임을 깨달은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는 어린 경록의 시선은 현재 경록의 시선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자신을 "아빠가 싸지르고 간 똥"처럼 느끼는 경록의 감각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는 것이다. 경록은 백화점 지하주차장에서 일하며 손님 입구가 아닌 별도의 지하 입구로 출근한다. 영화는 그의 동선을 통해 내면의 소외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왜 달려왔어요?" "걸어와도 괜찮은데."
두 번 반복되는 이 대사는 서로를 향한 사랑의 확인인 동시에, 그 사랑을 대하는 두 사람의 사려 깊은 태도를 드러낸다. 달려가는 행위가 감정의 가속이라면, 걸어오라는 말은 관계의 감속이다. 경록과 미정은 자신은 숨이 차게 뛰어왔으면서도 상대는 숨이 차지 않기를, 이 춤이 너무 빨리 끝나지 않기를 바라며 느린 박자를 권한다. 멀리서 그들을 비추는 익스트림 풀샷의 카메라처럼, 이들은 궤도 위의 서로를 온전히 소유하려 들지 않고 그저 각자의 속도를 긍정하며 곁을 지킨다.
경록과 미정의, 경록과 세라의 레코드샵 장면에서도 같은 구도에서 같은 노래를 듣는다는 반복이 이어지지만, 질감은 다르게 나타난다. 경록과 미정의 첫 번째 방문이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한 고백 이전의 설렘('비포 선라이즈'의 오마주처럼 느껴지는)을 담았다면, 미정이 떠난 후 세라와의 두 번째 방문은 부재의 확인이다. 같은 공간, 같은 음악 아래 옆자리의 사람은 바뀌었지만 경록은 여전히 미정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다시 한 번 감각하는, 고통스러운 이별이다.
'파반느'가 경록과 미정과 요한만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은 이 영화를 더 크게 만든다. 요한이 '청춘들의 이야기를 쓴다'고 말한 직후 차례로 등장하는 장면들-지하주차장에서 홀로 춤을 추는 경록, 짐을 옮기는 미정, 박스를 깔고 앉아 쉬는 직원들, 계단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 손님에게 모욕을 당한 뒤 담배를 피우는 세라-은 이 영화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분명히 한다. "걔네들 다 외로워서 그래"라는 대사처럼, 타인의 사랑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가 외로움의 증거로 비춰지는 곳. 영화는 이들의 일상을 비추며 개인의 서사를 지하에서 일하는 모든 청춘의 보편적 외로움으로 확장한다.
영화 안에서 시간이 어긋나는 감각-미정이 핸드폰을 쓰지 않아서, 경록과 미정이 구두로만 약속을 잡는 80년대적 질감 위에 아이폰이 공존하는-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파반느는 16세기의 음악이지만, 외로움과 이탈은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 그 어긋남이 오히려 이 영화를 어느 특정한 시간 안에 가두지 않는 것처럼도 보인다.
영화는 아이슬란드의 풍경 위로 흐르는 미정의 목소리로 끝을 맺는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당신에게 받았던 빛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요. 그때까지 잘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미정의 마지막 고백은 이 영화가 견지하는 태도다. 요한의 소설 속 문장처럼 '해피엔딩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춤이 끝나고 무용수들이 흩어져 홀이 조용해질지라도, 그 춤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파반느'는 만남의 시작보다 이탈의 과정에 더 깊은 관심을 둔다. 그리고 그 이탈이 반드시 상실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린 박자로, 천천히, 설득한다. 결국 제목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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