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은 일본인이 될 수 있나?”
극단 돌파구가 2026년 첫 창작 신작으로 선보인 <튤립>은 이 잔인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일제강점기라는 거대한 시대의 파고 속에서, 연극은 총성이 울리는 전장 대신 고풍스러운 ‘집’과 ‘정원’을 무대로 삼는다. 하지만 그 일상 속은 비일상으로 가득하다. 온통 검게 도배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다섯 인물의 삶은, 전쟁이 인간의 얼굴을 어떻게 일그러뜨리고 이름마저 빼앗아 가는지를 증명한다.
연극의 제목이자 핵심 오브제인 ‘튤립’은 화려한 꽃보다 ‘구근(뿌리)’을 키우는 식물로 정의된다. 땅 위로 드러난 줄기와 꽃잎은 꺾일 수 있지만 땅속 깊이 박힌 구근은 사라지지 않고 다음 생을 준비한다.
이는 주인공 나카무라 쿠로(막산)의 정체성이자, 그가 20년간 지켜온 기억에 대한 은유로도 볼 수 있다. 얼굴에 검은 페인트 자국을 묻힌 채 ‘조선 까마귀’라 조롱받으면서도 그가 도쿄 대학 정원에서 튤립을 가꾼 이유는 하나였다. 전쟁 중 튤립 꽃밭에서 빼앗긴 아들, ‘쥬리프’를 향한 보이지 않는 뿌리를 지탱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연극은 모든 인물이 검은색 벽에 붙어 무대 위의 대화를 침묵 속에서 경청한다. 필요한 인물만 무대 위에 올라있는 게 아니라, 일상의 가장 내밀한 대화조차 누군가에게 들리고 있으며, 모든 진실이 검은 벽을 타고 공유되고 있다는 이 시각적 연출은 그들의 ‘비일상’을 극대화하여 긴장감을 자아냈다. 이러한 배치는 인물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있음을, 나아가 이들의 안온한 가정이 실상은 얼마나 위태롭고 작위적인 공간인지를 보여주었다.
학교와 쥬리프의 집, 두 공간 속에서 극은 인물들의 미묘한 균열을 내보인다. ‘아들 쥬리프가 친구를 집으로 초대했다’는 일상적인 문장은 이 극에서 가장 첨예한 대립의 시작점이 된다.
야마토는 조선인의 아이를 훔쳐 20년 동안 키워낸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의심한다. “내선일체란 가능한 것인가?” 20년의 세월로도 피에 흐르는 ‘근원’을 지우지 못했다는 야마토의 공포는 식민 지배의 불안정함을 그대로 투영한다.
아들을 끔찍이 여기며 키운 어머니 에리코는 진실을 마주했을 때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다. 쥬리프의 근원을 지우기 위해 친부인 쿠로를 독살한 것이다. 침묵하고자 했던 과거가 까발려지자, 더 큰 폭력으로 그 진실을 강제로 침묵시킨 셈이다.
“어쩌면 한 번도 존재했던 적이 없는”이라는 말은 극의 감각을 전체적으로 표현해준다. 일본인으로 살았으나 조선인의 피를 가진 쥬리프, 조선인 막산으로 살지 못하고 ‘쿠로’로 죽어간 남자, 그리고 허상 위에 쌓아 올린 행복을 지키려 살인자가 된 에리코. 전쟁은 그들에게서 본래의 얼굴을 앗아갔고, 그 자리에 타인이 덧씌운 가짜 얼굴을 고착시켰다.
극의 마지막, 쿠로의 죽음을 모른 채 히로시마로 떠나는 쥬리프의 뒷모습은 허구로 뒤덮인 일상을 보여준다. 쿠로의 죽음으로 완성된 듯 보이는 평화는 가장 지독한 비일상의 시작일 뿐이다. 구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생을 밀어 올린다. 야마토가 쥬리프의 2년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진실은 강제로 덮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리코가 만든 인위적인 침묵은 금방 깨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연극 <튤립>은 당신의 안온한 일상 아래, 어떤 비일상의 뿌리가 얽혀 있느냐고 묻는다. 그 위태로운 일상의 이면을 목격하는 순간, 우리 안의 구근 역시 조용히 고개를 들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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