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맞아 용인 집에 돌아간 나는 옷장에서 입을 내 옷을 꺼냈다. 서랍을 여는 순간 강렬한 나프탈렌 냄새가 훅하고 코를 찌른다.
2023년 엄마의 기력이 이상하게 좋았던 가을, 엄마는 옷장을 다시 정리했다. 자신의 옷을 두는 칸과 미처 내가 갖고 오지 못한 옷들을 들어간 칸을 완전하게 나누어 정리했다. 그러면서 어느 해 좀이 슬어버린 내 옷들을 보고 놀라 나프탈렌을 한꺼번에 사와 옷장 구석구석에 놓아두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정리된 옷가지들은 지금도 그렇게 정리된 그대로 옷장 안에 남아있었다. 2년이 지난 지금 나프탈렌은 반 이상 줄었지만, 냄새는 여전히 선명했다.
자정 넘어서까지 제기를 닦던 누나는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지 못한 채 차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못했다'고 하지 않는 건 이미 아빠가 두 차례나 깨워도 일어나길 거부했으니 안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을 일이었다. 사실 작은 누나는 원래부터 명절의 반복적인 루틴에 반감이 유독 심한 편이다. 처음엔 손의 위치(망자나 조상의 경우 여자는 왼손을 오른손 위에 포개는 식)를 고집스럽게-그거 아니라고 말해도- 안 바꾸다가 다음 해에는 의례대로 하기도 하고, 늘상 서 있는 위치에서 갑자기 맨 끝자리로 가려고 하기도 하거나 하는 건 그냥 해마다 한두번 하는걸 기억이 안 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설날이나 추석마다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것들에 대해 한 해는 음식 장만하는 걸 돕다가도, 그 다음 해에는 내가 그걸 왜 해야 하느냐고 거부하기도 한다. 차례상을 물릴 때도 끝나기가 무섭게 상을 치울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떨 때는 아예 본 척도 안하고 방으로 들어갈 때도 있다. 아예 씻지 않고 옷만 갈아입고 참석할 때도 있다. 대학시절 한창 UBF라는 기독교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을 때랑 그 뒤에 기억나지 않는 언젠가 차례도 아예 빠진 적이 두어 번 있던가 했지만 어지간하면 차례는 꼭 같이 했었는데, 이번 설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난 제사가 삼년상이었고 이번 설부터 엄마의 차례상은 차리지 않게 되었다. 아빠는 새벽부터 홀로 떡만둣국을 끓이고 못골 시장에서 당신이 직접 사온 제수들로 차례상을 차렸다. 늦은 밤과 새벽부터 들리는 거실 소음에 나는 한 세네 시간 잔 거 같다. 용인 살았을 적에도 바깥 소음에 익숙했던 건 아니어서 침대 머리맡에 커넬이어폰을 걸어놓고는 새벽에 소리가 들리면 깨어나 끼고 잤었다. 놀랍게도 나는 잠을 설치고 있다는 사실에만 몰입했던 건지, 아빠가 혼자 준비한다는 사실에 아무런 자각이 없었다. 근데 아빠는 좀 특이한 구석이 있는 게, 이렇게 혼자 준비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도 없고 생색 내는 일도 없다.
"네 아빠가 딱히 쿨한 성격이라서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주방에서 딸기를 씻어 꼭지를 떼고 있는 동안 소파에서 엄마가 말했었다.
"그냥 자기가 감정 상할 상황을 먼저 만들어내는 걸 무서워 하는거지. 소심한 인간이야."
엄마의 말년에 나눴던 대화를 계속 곱씹게 되는 건 예전엔 으레 엄마들 하면 하는 그런 말들- 좀 구태의연하고 피상적인 말들(가령 아빠의 성격에 대해 '가족에 무심하다. 바깥으로만 돈다' 정도로만 말하는)만 했었던 엄마가 이렇게 자신과 주변 상황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구체적인 부분까지 파고들어가 나름의 해석을 하는 게 많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미 속으로는 충분히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고 적당히 삭이던 것을 나 같은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라고 봐야할지도 모르겠다. 당시에 엄마가 이런 분석을 시작할 경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인상적이었지만 뼛속까지 애(愛)가 거의 없는 증(憎)만 사무친 듯한 아빠에 대한 얘기를 듣노라면 아빠의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쓸모 없는 존재로서 나락에 갈 정도로 끝도 없을 지경이었기에 내가 적당히 끊어서 들어야 할 정도였다. 꼭지를 뗀 딸기를 접시에 담아다 엄마에게 주려는데 안방을 가리키며 엄마가 말했다.
"아빠부터 먼저 드려야지."
그렇게 차례상을 차린 아빠는 나머지 일을 우리들이 알아서 할 거라고 먼저 생각하는 것도 특이하기는 하지만, 또 얼추 맞는 생각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 차례상 차리는 건 제주의 몫이긴 했으니까. 차례를 마친 뒤 나는 차례상을 정리한 뒤 전을 부치고 국 데우고 하면서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했는데, 이때 일어난 누나는 제기는 자신이 씻겠다고 했다.
보통 차례가 끝나고 아침을 먹은 다음에 아빠의 성화로 아침부터 성묘를 가곤 했다. 오후부터는 귀경 차량과 뒤섞여 차가 막힐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불과 이삼년 전까지도 아빠의 성화는 당사자가 아닌 사람의 성질을 긁을 정도로 신경질적이었다. 다른 식구들은 아침을 채 다 먹지도 않은 상태에서 본인 혼자 빠르게 그릇을 비우곤 '빨리 치우고 가자!'부터 말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당신 나이 칠순 전후로 하여 차를 팔고 면허를 반납한 뒤 집에서 유일하게 차를 갖고 있던 작은 누나의 차로 성묘를 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빠는 계속 그렇게 성화를 부렸는데, 누나가 내비게이션을 틀고 운전을 할 때마다 틀린 경로로 간다면서 짜증을 내지를 않나, 그렇게 가면 안 되다고 호통을 치지를 않나 하여 안 그래도 운전이 영 손에 익지를 않았던 누나의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일도 잦았다. 그러다 엄마 돌아가시고 아빠도 부쩍 나이듦이 느껴졌던 게 그렇게 짜증도 내지 않고 그냥 못마땅해하는 정도로만, 나중에는 그냥 신경을 쓰지 않는 식으로 조금씩 누그러져 간 것이다.
이번에는 아빠의 성묘가자는 말에도 누나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식으로 자신의 반대의사를 표했고 내가 성묘가야지? 하는 말에 아예 운전을 하기 싫다며 아주 귀찮아하는 반응을 보이길래, 지난 추석에 이어서(추석때는 비가 내려서 안 갔다)올 설도 성묘는 못가겠구나 싶었다. 현관 신발장 위에는 아빠가 미리 사온 2kg 농약 봉지 세개가 놓여져 있었다.
성묘 대신 집 뒷산을 올랐다. 광교산 줄기인데 버들치고개를 경계로 나뉘어져 여기만 따로 떼어 놓으면 매봉산이라고 부른다. 이사가고 거의 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5년이란 시간이 길긴 길었을까 그래도 근 14년간 줄곧 걷던 집 근처의 길인데 그 시간이 아득히 예전처럼 느껴졌다. 건강할 땐 엄마도 용인 친구들과 형제봉까지 올랐던 적이 있는 산이다. 엄마는 종종 천년약수터까지 갔다왔다고 말하곤 했다.
철저한 애도라는 건 뭘까 생각했다. 형제자매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 내 신체의 일부가 도려져나가는 기분이라고 했던 말이 지금에 와서야 실감이 났다. 나는 신체 상실이라는 즉물적인 느낌까지는 아니지만 아주 오랜 시간을 같이 해온 존재가 잊혀진다는 것이 내 일부마저 녹아내리는 것과 같다고 느껴져 두려웠다. 이 기분은 그렇게 잊고 갈 수 없다,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는 과거에 머무른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애도란 지금 이 시간 속에서 나보다 먼저 떠나간 존재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현재화'할 수 있는가와 관련이 있다. 애도는 단순히 타자의 상실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자꾸 나를 길어올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애도란 타자와 나의 존재가 포개어지는 형식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과거의 어떤 죽음은 나라는 존재의 죽음이 스며든 현재와 같다. 삶은 죽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애도는 죽음의 기억이자 동시에 시시각각의 발견인 것이다. 하지만 밀린 숙제를 한번에 해치우는 식으로는 그런 식의 애도가 가능하지 않다. '완벽한 애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려는 시도도 나로선 적절하지 않다. 결국 애도도 내 삶의 방식처럼 가야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 리추얼은 그렇게 지속되고 반복되어온 일상의 일부분을 형식적으로 다듬고 정교화하는 형태로 조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매봉산의 길을 걷다 문득 엄마가 이 곳을 걸었었을 어느 해의 시간을 떠올리게 된 나는, 너무 샅샅이 상기하려고 노력하지 말자, 대신 어쩌다 한번씩 여력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떠올려보자, 내 특유의 넓은 활동 반경을 활용하여 생각지도 못한 자리에서, 물건으로부터 엄마를 떠올리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다. 옷장 속 내옷 틈에 끼워놓은, 아직 채 증발되지 않은 나프탈렌을 보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