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석에서 기내영화 보기

by 흘흘

비행시간이 아주 긴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싶다. 칠레라든가 나미비아라든가 호주 같은...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싶은 건 꼭 목적지 때문은 아니고 이코노미클래스 안에서 보는 그 두뼘만한 AVOD 창으로 보는 영화가 이상하게 재미있어서다. 작은 화면인 게 또 그것 나름대로 이상한 매력이 있고 저질 이어폰으로 듣는 다소 자글거리는 듯한 음향이 나한테만 속삭이는 것 같은, 기내소음과 뒤섞여 아련한 느낌이 나는 그런 것도 좋은데, 특히 한국방송계에서 거의 실종되어버린 한국말 더빙 외화를 보는 게 흔치 않은 흥밋거리다. 성우들의 외화 더빙 억양이라든가 어조 같은, 그 약간 전형화된 연기 패턴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는데 이 욕구를 기내 영화에서 채우고는 한다.

요새는 국제선 비행기 안을 둘러봐도 avod보다는 자신이 갖고온 콘텐츠를 태블릿pc등으로 보는 사람이 더 흔해진 것 같다. 영화를 보더라도 한 편 볼까말까 싶은데, 난 지금도 최소한 세 편 내지 네 편은 연달아 보고야 만다. 첫번째 영화는 보통 개봉관에서 한 유명한 영화를 많이 보니까 오히려 기억에 잘 안나는데 그걸 비행기 안에서 봤는지 실제로 내가 극장에서 본 건지 헷갈리기 때문이고, 그래서 고르고 고르다 결국 아무렇게나 고르게 된 세번째 영화쯤부터 비행기에서 본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기내 안의 승객들도 기내식을 비운 지 한참 지나 대부분 잠든 상태고 비행기도 불이 꺼져 있으며 갤리에 가도 간식이 별로 남은게 없는 느낌, (외항기) 승무원들한테 뭐 주문하면 굉장히 귀찮아하는 딱 그 시간대인데 그때 그 고요하고 따분하고 피로한 느낌에서 보는 영화가 계속 기억에 남는 것이다.

아무래도 비행중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특히 여행 소재 영화가 재미있는 거 같다. 여기에는 작품성이 꼭 중요하지는 않다. '싱글라이더'라든가, '어디갔어 버나뎃'같은 영화같이 너무 명작이 아니라 적당히 어중간한 여행영화가 비행기안에서 보기가 딱 좋고 기억에 많이 남는다. '다즐링 주식회사'나 '어웨이 위고', '세 얼간이', '버킷리스트'같은 것도 '기내에서 세 번째'로 보면 딱 좋을 거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이 영화들을 간접적으로 까는 건 아니다)

심지어, 엄마가 돌아가셔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로마발 서울행 비행기에서조차- 나는 비행기 안에서 잠들지도 않은 채 또다시 영화를 틀어놓고 있었고 그때 본 '패스트라이브즈'조차 지금 내가 말한 이 조건에 모두 부합되어서인지 기억에 남아서 이게 기억에 남는다는 거 자체가 너무 이상하고 이 상황에 화면에 눈을 두는 나는 미친놈인가 싶은 마음조차 들었던.

이전 10화2018년에 생각했던 2014년의 포르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