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포르투에서.
시차가 7시간에서 8시간으로 벌어지니 기분이 이상하다. 한 시간의 차이가 이렇게 클 수 있을까. 사실 여기가 내가 머물렀던 피니스테라보다 더 멀다고는 할 수 없는 곳이다. 같은 경도상에 있는 곳이니까. 하지만 8시간으로 벌어지니 내가 잘 시간에 한국은 출근 시간이 된다고 하니, 좀더 아득하게 멀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깜깜한 밤은 지금 이 순간 나 혼자 체험하고 있는 거구나...
카미노에서 다리가 쑤시는 걸 빼곤 단 한번도 어디가 아프다거나 한 일이 없었는데 어제 저녁에 기름을 잔뜩 뿌려놓은 대구튀김이 너무 느끼했는지 설사를 몇차례 했고 갑자기 몸이 약해진 것 같다. 아침엔 과일만 먹고 점심은 마치 과일 뺀 해독주스같은 맛이 나는 양배추수프에 샌드위치같은 걸 먹었다... 그다지 싸지 않다. 이젠 더 뭔가 궁금한 음식같은 건 없다 에그타르트를 아까 먹었는데 갓 구운거에 익숙해 그런지 내다파는 건 한국인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너트메그향이 좀 나는 걸 빼곤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 먹던 거나 잘 먹어야겠단 생각.
여행을 하고 있다고는 해도 언제나 한국의 가족들을, 친구들을 생각한다. 나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무감각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겠다고 얘기하지만 실제론 이런 저런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체감하고 있다. 입으로 소리내어 기도를 하지는 않아도 결국 나는 지금, 수만 리 떨어진 나의 사람들을 향해 어떤 기도같은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행복에 대해서 생각했었다. 결국 뭔가에 대한 행복이라는 것이 어떤 조건을 취득함으로써 주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행복이란 결국 '우리'를 통해서 주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자유라는 것이 관계에서 주어지는 것이듯 행복이라는 것이 일정부분 존재가능하다면(그냥 내가 생각하는 건 '잘 사는 것'정도다), 그것은 '우리'를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일들을 생각하고 나의 일이 우리에게 어떻게 이어지는지, 뭔가를 쓴다는 것이 누군가가 읽는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로 넘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제 어떤 감정이나 감흥 감각에 대한 것들을 언급할 때 더 이상 진부해질 대로 진부해진 '나'만을 두고 일컬을 수 없게 된 것 같다.
누가 이 글을 읽을것인가?
2018년
사람이 곱게 늙을라면 곱게 늙을 수 있게 하는 자기 일을 갖고 살아야 하는 법이다. 잘 산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며 그저 추하지 않게 산다는 것이기에, 그러니까 추하지 않게 살 수 있는 자기 방법을 갖고 살면 되는데, 그 방법이 여전히 마땅치 않다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충분해 보인다 해도 '어떻게 그 사람이 그럴 수가!'라고 경악하는 상황을 반드시 자초하고야 만다.
결국 자기 일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일이란 사전적 의미에 얽매이기보다는 추해지지 않게 만들 수 있는 내 일이다. 살아갈 값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일이다.
남들이 보기에 '충분해 보이지 않아도' 그것만으로 명료하고 아름답게 사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앞서 해낸 일, 즉 누가 결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시선과 시야를 갖게 된 끝에 가능한 일이기에, 오히려 어떻게 보면 대량생산된 지식에 의존해서 사는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동어반복을 하면서도 그 반복 속에서 나의 말을 터득하게 된다. 자기 일을 갖춘 사람들끼리의 관계는 공감과 독립성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언제가 됐든, 어디서가 됐든 우리는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새벽녘에 꿈을 꾸고 난 뒤, 깨자마자 순식간에 망각되어버린 꿈의 내용을 복기하려 애쓰다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포르투, 는 그 도시 자체가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 형상화된 그런 것이었다. 너무나 묵직하고 커다란, 그러나 막막한, 한 가지로 엮이지 않는 총체적인 그리움이었다.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었다. 처음에 떠오른 사람은 분명히 내가 만났던 그였지만, 하지만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점점 그 사람 역시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말 이상의 포르투처럼 나타난 그리움이었다. 언제가 됐든 어디서가 됐든 어떤 식의 만남이 됐든, 나는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지만 최소한, 나의 일을 가진 채, 나의 말을 가지고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