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자존감이라는 말이 너무 남발되는 감이 있어 쓰고 싶지 않은 표현이 되었지만 그래도 내가 느끼는 자존감이란, 스스로에 대해 최소한의 (부당하고 근거 없는) 부조리를 느끼지 않는 최소한의 상태를 부르며, 이는 자긍심과는 구분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자존감을 실감하는 것은 순간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짧지만, 이후로도 매우 일관되게 반복되는 점멸 현상 같은 것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을 이루는 세포가 3년이면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교체됨에도 불구하고 '병'은 일종의 관성적 메커니즘으로서 세포가 교체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지속되듯, 자존감 또한 한번 형성되면 고정 지속되는 존재가 아니라 그때그때 순간 발현되고 사라지되 일정 형태로 유지되는 현상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나는 자존감이 내가 나의 존재를 실감하는 신체 감각의 일종으로서, 마음 속으로부터 발견되는 것이 아닌 몸을 쓸 때에만 스스로 관찰 가능한 현상 같은 거라고 느꼈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를 걷기를 통해서 짐작했다. 나는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장거리의 걷기를 수시로 해왔지만, 내 스스로 이 걷기가 곧 나의 여행의 주된 내용이 된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걸으면서 펼쳐지는 일련의 풍경과 마음의 파노라마들이 그냥 여행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의 여행담을 듣고 보면서 저들의 여행이 왠지 더 의미 있고 재미 있어 보인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걷고 있었고 여전히 나의 여행은 진행중이었다. 걷고 있는 나는 이미 예전의 무수하게 반복되어 온 걷기로부터 무수히 이어졌지만 예전의 걷기는 지금의 걷기와는 연속성을 느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반복된 흐름의 현상이 내 몸을 통해서 꾸준히 구현되고 있었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행위가 연속되지 않으면 감각의 흐름 또한 끊기고 망각된다. 이번에 내 에세이 형태의 글들을 엮어 책으로 만들기 위해 이십수 년간 써온 글들의 흐름을 쭉 읽어오고 있는데, 이전엔 2021년 이전의 글들에 대해 정리가 많이 필요한 '흐트러진' 글이라고만 생각했으나,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보니 스스로도 좋다고 느끼는 글들이 분명 있었다. 특히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고 돌아와 입사하기 전까지의 약 1년간 쓴 글들이 생각보다 좋았다. 그러니까 그 뒤에 쓴, 회사를 다니면서 간간히 생각하며 느끼던 것들을 기록했던 것보다 나는 이때 쓴 글들이 더 좋았는데, 차이라고 한다면 2014-5년 초의 나는 시간이 많이 '남아돌'아서 마음이 홀가분한 상태였고 그래서 스스로의 행위에 집중하고 되풀이할 수 있었던 상태였다.
이제까지 나는 내가 나이를 들어갈수록 '성숙'해지거나 생각이 발전되어 갈 거라고만 막연히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일단 '좋은' 글은 성장과 무관하다. 누군가를 '짧은' 생각에 근거하여 험담하는 어린아이의 글이 진솔하고 좋을 수 있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인데, 그 아이가 그 자신의 짧은 생각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글에서 우러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 삶을 책으로 쓰면 오백 페이지도 넘을 거라는 분의 얘기가 흐릿하게 느껴지는 건,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로 자기 삶을 자기 시선으로 보지 못하고 사건의 나열로 얘기해서도 있는데, 이 경우 당사자는 평생을 계속해서 같은-자신을 관통하지 못한- 사건들을 되풀이하며 한을 풀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가 언제까지고 그런 글을 쓸 수 없고 어르신이 어느 순간 자기 삶과 무관한 말들로 놀래킬 수 있다.
무언가를 한번 경험했다고 하여 그것이 순순히 나의 것이 되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사실 '나의 것'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체화는 반복 속에서 구현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스스로를 직시한다는 것은 한번만으로도 강렬한 체험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을 이어가려면 매 순간 처음부터 다시, 그리고 반복해서 해야 하는, '지속되는 상태'가 아닌 '시도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이런 연유로 여태까지 나는 무언가를 많이 했다고 해서 그걸 능숙하게 하고 있다고 느껴본 적은 없지만, 할 때마다 늘 서투르고 처음같은 시도들이 무수히 반복됨으로써 그 자체로 어떤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의 시선에선 이것이 능숙함이라고 보일지도 모르지만 정작 이 행위의 당사자인 나는 이것이 과거의 걸음, 과거의 여행, 과거의 나의 어떤 무엇과 같은 것이고 그것이 축적된 무엇이라고 느껴지는 바가 없을 정도로 늘 처음과 같은 느낌으로 생소할 뿐이다. 지금까지 내가 행한 것과 내가 먹은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고 말하고 나도 그런 믿음 속에서 어떤 방향성을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그 행위를 하는 동안에는 그런 것들의 효능감을 잘 모른다.
이와 달리 '자긍심'이란 일종의 모방된 감각 같은 것-이라고 나는 정의하는 것-이다. 나 자신의 어떤 상황과 형편을 자랑스러워하는 그 기분은 자존감과 다르고, 어디선가 익숙하게 들어온 서사라든가, 이미지를 자신에게 투영시키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이는 도저히 능숙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본질의 자존감을 대신한, 어떤 고정화된-고정화를 기도하는- 존재로서 기능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령 가족과 상호소통하는 구체적인 상황과, 가족을 책임지고 있다는 자긍심은 다른 것이다. 자긍심이란 이상적인 무언가가 재현되어 '누리는' 것인데 다만 그것은 결국 매 순간순간 변하고 일신하는 비재현적인 자존감의 상황 앞에서 쉽게 무기력해진다.
자존감 해석의 근간을 외부의 특정한 것들에 의존하게 될 경우 사는 것은 지옥같아질 수도 있다. (성숙과 축적은 타인(보편)의 관찰과 평가-그리고 그것을 자기 내면화하여 성립되는 것이고 나 자신이 나를 인식할 때에는 도저히 성숙과 축적을 실감할 길이 없다.)그 어떤 비유에도 나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매 새벽마다 내가 남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죽고 싶다는 기분이 드는 것처럼-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새벽의 또 다른, 까닭 모를 기운에, 그 어떤 익숙한 서사의 감정을 담을 수도 없는 그 무뚝뚝하고 감정 없는 새벽의 공기로부터 이상할 정도로 강한 격려를 얻는-그러나 그 격려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것처럼. '나'처럼 살려고 한다면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지만 오히려 언젠가의 그 죽음은 내게 만족스러운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도 어쩌면 이런 것과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