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와 최선

by 흘흘


그에게 있어서의 최고의 사랑은 이제 아쉽게도 끝이 났고, 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가 언제나 지나간 사랑에 대해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즉 모든 면에서 좋았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작업에 대한 견해라든가 창작에 대한 태도, 그리고 섹스까지. 작업의 경우는 좀 나는 그와 견해가 달랐다. 그들은 참 정석적이고 교과서적으로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관심가는 것들이 무엇인지, 관심 받게 하려면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자신의 '최애'와 한동안 쌓아올린 그 많은 맥락들 덕분에 그것들을 다 생략하고 말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자기 소개의 말미에 내가 글을 쓴다는 '고백'을 했던 걸 차츰 후회하게 되었다. 내가 글을 쓴다는 말에 그는 궁금해하며 글을 보길 원했고 몇 편의 글을 보여줬다. 난 딱히 피드백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뭔진 알겠지만 말은 하지 않겠다는 미묘한 입매를 보는 것이 무척 싫었던 나로서는 뭐라도 한번 얘기해보라고 마음에도 없이 졸랐다. 그때마다-그러니까 나는 다음에는 다른 말을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또 보여주기를 몇 차례 반복했던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내가 쓰는 글들은 너무 소소하고 때때로는 분명하게 드러나야 할 부분이 드러나지 않은 채 사그라드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늘 딱 그 정도까지만 얘기하고 말았는데, 이래서는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기 어렵다는 걸 은연중 알리고, 나아가 그의 관심사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걸 맥락상으로 쉽게 알 수 있었다.

내가 그의 눈높이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울 정도로, 처음 기대감을 갖고 있던 그의 눈빛이 점차 풀리더니 어느새 시시해지는, 니가 무슨 얘기 하는지 난 다 안다, 아니 그거보다 더 첨예하고 진일보한 주제가 뭔지 안다는 식의 나른함이 느껴질 때 이번 만남은 여기까진가보다 싶었지만, 그는 내 글보다는 역시나 내 특유의 경청능력을 높이 사는 것 같았다. 사실 난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 건지 그냥 얘기 듣는 게 재미있고, 사람들이 저마다 흥미를 갖고 열을 올려 얘기하는 것을 극우적 정치성향에 대한 얘기만 빼면 잘 듣는 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여기 인간들은 그걸 자존감이라고 불러야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이상한 자격지심인지와 분간되지 않는 유아독존적 자존심이 고스란히, 혹은 이상하게 뒤틀린 채로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냥 끼리끼리 만나서 그런 거 아닌가라고도 생각은 했다. 그런 욕심과 야심이 있는 애들이어야 너의 성에 차는 '수준'에 이르는 것 아닐까 하고. 욕심과 야심은 적당히 스스로에 대한 허풍을 풀무삼아 활활 타올라야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 만큼의 실천적 작업을 진척시키기 마련이니까.

어쨌든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대부분 이해는 할 수 있고 적어도 뭘 의도하는지는 알 수 있으며, 못 알아들었다고 해도 그건 니가 설명을 정확하게 할 줄 몰라서이므로 니 언어 능력을 키우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이며, 또한 동시적으로 그가 소홀히 하는 가장 '뻔하고' '구태의연'하지만, 여전히 효력 있고 의미있으며 또 동시에 니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런 것들이 그렇게 한없이 조야하거나 진부하지 않다는 사실 또한 지적할 수 있는 능력 정도는 있기 때문에 그에게는 나름 일리는 있다, 다만 여전히 네가 소중하게 여기는 듯한 그런 것들은 '이 바닥'에서 딱히 주목을 받기는 어렵다 정도로 인식 되는 듯 했다.

아무튼 나는 그가 하는 말들이 늘 흥미로웠다. 뭣보다도 그가 그간 자기 성에 차야 상대할 수 있었던 일종의 파트너의 자격 요건을 내려놓고, 그저 내가 잘 듣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나와의 대화에 활기를 느끼고 만나는 건 이 관계가 아직 효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했으니.

또한 나머지의 경우, 나와 하는 것이 '최애'와 했던 것과 비교해서 별로라는 것을 내색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 처음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었다. 사실 이것이 그를 계속 만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한데, 아무튼 그는 외모적으로 괜찮은 편이었다. 자기관리를 중요시하는 사람답게 웨이트와 유산소 모두를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이 느껴지는 균형잡힌 몸. 트렌드라는 것과는 담을 쌓은 나와는 다르게 이른바 TPO를 철저하게 맞춘 세련된 옷차림 등등. 오히려 그가 왜 나를 만나는지를 묻는 게 더 먼저여야 할 것 같다. 어쨌든 나는 그가 이따금 빡치게 만드는 포인트들은 적당히 모른 척하면서 만족했다.

여기에 더불어 나는 그간 대체로 섹스에 대해 그렇게 만족해 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그는 이 점에서도 독보적이었다 해야할까. 그가 자신의 최애와 쌓았으리라 추정되는 노하우를 나에게 적당히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그간 해온 그 구차하고 쓰레기같이 몹쓸 섹스와 비교하면 얼마나 훌륭하고 배려있던지, 또 질퍽하고 추잡할 땐 어찌나 추잡한지, 타이밍과 완급의 조절 면에서의 아찔함 등등. 나는 이 섹스를 통해 당황하고 멈칫하기까지 했지만, 그에겐 아무렇지 않은 걸 보면서, 그가 자신의 최애를 왜 아직도 으뜸으로 여기고 노스탤지어를 품고 있을까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납득당해버렸다. 아름다운 패배감이란 게 이런 걸까. 그의 최애의 작업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는데 그의 최애와 자고 싶어졌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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