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창릉천과 관련된 기타 잡담들
아름다움이란 말은 작품 그 자체에서는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을 관념어지만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일종의 동바리나 거푸집같은 구실을 하는 것 같다. 적어도 아름다움은 작품의 축조 과정에서는 빠져서는 안 될, 다시 말해 최종의-작업-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대체할 본 재료를 부어넣기 전까지 외관의 향방을 결정할 구조를 떠맡는다.
다만 전에 썼던 '4월의 창릉천'의 경우 대놓고 아름다움이란 말을 써서 스스로 뭔가 느낌이 반감된다고 느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아름다움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혹은 그것들을 알아차렸으나 그 말을 쓰는 것이 왠지 낯간지럽고 유치하며, 나로선 '진심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몹시나 꺼리던 나 자신에게 뒤늦게 인지되고 좀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 '아름다움'들이 오히려 구체화된 물질처럼 느껴지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에 이 말을 쓸 수밖에 없었다. 비거스렁이나 윤슬이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되고 나서 그 말의 어감이 좋아 비가 그친 후의 서늘함과 강물결위로 반짝거리는 햇볕을 겪을 적마다 놓치지 않고 비거스렁이야, 윤슬이야라고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나도 그것들에 익숙해진다면 그 말들을 굳이 끄집어내지 않고도 그 말들의 둘레들을 이야기하는 게 더 흥미롭고 즐겁다고 느낄 일들이 많을 거라고 믿어본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내가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도,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허용'한다는 것과 같은데, 나에게 '허용'이란 말 또한 너무나 어렵고 주저되는 감각이기에- 오히려 모든 것이 부진한 나 자신으로서는 이 말들 모두가 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진부하지 않고 그렇게까지 관념적이지는 않은 탐구의 대상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냥 골조가 그대로 드러난 동바리와 거푸집이 그냥 건물의 완성된 자재처럼 보이고 만 것이다. 아무래도 그런 것은 그다지 '예쁠'수 없을 것 같지만 나는 충분히 흡족할 것이다.
요 최근에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계기들은 자연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작업과 작품을 통해서였지만 그조차도 그것을 느낄 겨를은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모든 알아차림은 거기까지 향하는 충분한 과정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내가 겪은 아름다움의 특징 중 하나를 꼽으라면 그것은 그 과정과 아무 상관없이, 인과 없이 발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라고 느껴지는 어떤 단정을 무사히 내려받는 과정에서 그것을 보존코자 얼마나 많은 모래와 충전재들이 필요하던가- 깨지기 쉬울수록, 상하기 쉬울수록 더 많은 충전과 보존의 시간들이 필요한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름다움부터 꺼내어 확인하려는 나에게 충전재와 모래는 고려조차 되지 않고 포장을 뜯자마자 버려지고 의식되지 않는 따위들이지만 정작 그 아름다움이 파손되어 배송된 순간 곧바로 의식되는 건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했던, 나의 무상하고 쓸데없는 시간의 충전재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현장에서 어떤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일단은 보고 듣고 기억하는데 집중하기로 한다. 지금은 시간의 몫임을 알고 기꺼이 스쳐보내기로 한다. 그리고 언젠가 지금의 내 막막함이 해독될 그 날을, 이도 저도 못하여 끝내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것들이 내 무의식 속에서 유유히 시간을 보내다 감각을 따라 떠오를 날들을 고대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