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 대한 경험은 언제나 시간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이 반드시 서로를 잘 '아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오래된' 관계를 회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관계가 반드시 서로를 향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맺어지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너'라는 존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혹은 신뢰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에게 놓여있는 절실한 화두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그 관계는 충분히 서로에게 의미있는 관계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표현의 욕구는 사실 누군가에게 자신의 화두를 절실하게 건네고 싶은 욕구와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여겨진다.
이런 점에서 '유목인'은 정착지향적인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기 쉽다. 그들은 '상대'라는 정착지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개개의 '화두'에 관계의 방점을 두기 때문에, 언제든 화두를 따라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에 능숙하거나, 혹은 그런 것들에 늘 서투르더라도 '떠나야 한다'는 불가항력을 차마 거역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착인'들은 그런 그들이 정이 없고, 언제든 자신을 떠날 수 있다 하여 경계할 수 있다. 물론 한번 끝을 맺은 화두에 다시 관심을 가지는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두는 돌고 돌 수도 있고, 같은 곡조에 다른 화성을 가지고 새로이 변주될 수도 있는 법이다. 물론 유목인이든 정착인이든 모든 사람들의 화두는 언제나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 언제나 같은 노래를 부르길 원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렇게 변화무쌍한 사람들을 감당하지 못한다. 유목생활은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맞닥뜨릴지도 모른다.
물론 때로는 각자의 양떼를 끌고 함께 산맥을 넘을 수도, 건기가 닥치기 시작한 들판을 떠날 수도 있으나, 나의 양과 그의 소는 서로 다른 조건의 풀을 원하기에 때로는 우리가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들판의 풀은 언제고 다시 새로운 계절을 맞아 돋아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어느 순간 우리가 다시 한번 이 들판에서 만나 서로의 양떼와, 그리고 소떼와 마주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믿음은 '너'에 대한 믿음이 아닌, 우리가 다시 '만날 것'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은 '너'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그 변한 너와도 결국 나는 만나게 되리라는 믿음, 너와 나를 넘어선, 너와 나를 먹여 살리는 이 들판의 생태계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가 지킬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이 생태계가 온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순리 그 자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