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외곬이 되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것 역시 어쩌면 상황에 내가 몰렸거나, 아니면 제도에 몰려서 그랬거나 내 스스로를 몰아세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닌 건 아닌 게 있으니 그것이 곧 내 존재 전체의 방향성을 좌우한다.
그런데 누가 뭐래도 이건 아니잖아, 정말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잖아라고 생각하는 바가 이 사회에 매우 극소수라면? 나는 이런 경우를 자주 보아왔는데.
제일 쉬운 건 다수가 되는 쪽을 선택하는 길이었지만, 그게 좀 그렇잖아. 살면 살수록 내가 살 수 없는 방식을 선택할 수는 없음을 알아가면서- 그러나 나는 살아야겠고 살아가는 방식은 하나의 흐름만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한다. 내가 다세포 생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지. 이 몸 안에 존재한 제각기 다른 장기들이 얼마나 다른 운동성을 갖고 있는지, 정신의 작용이 단 한 가지의 역량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지. 그런 이치를 이해하고 나 스스로를 단순히 하나의 역량으로 존재한다는 착각을 버려야지, 안 그래?
나에게 여러 개의 트랙이 존재할 수 있음을 믿는다면 삶은 투트랙 쓰리트랙 포트랙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삶의 트랙이란 여러 개의 막대그래프같은 모양이어야 할지도 몰라. 다만 그래프와 같이 방향은 같아야 할 거야. 나를 묶는 방향성을 좇아서. 내 자신이 중구난방의 방향성을 가짐으로써 오체가 분시되는 상황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홀로 진척시킬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진척될 수 있도록 속도를 내보고, 그럴 수 없는 것들- 현실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놓치지는 않되 이것이 누군가와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것들- 그 중에도 그저 같이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삼을 수 있는 것이 있고 협력을 통해 효과적인 진척을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분별할 수 있다면 좋을거야. 트랙 중에는 공식적이지 않은 것도 있지. 나는 나의 비선을 은밀히 준비하도록 하자.
한동안 하나의 트랙위를 신나게 달릴 때가 있어 그러나 그 트랙의 어느 지점에서 일단 이 순간을 참아야 한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어 아직 진척을 볼 수 없는데 나는 그게 진척된 그 상황 속에 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을 느껴야만 하는 순간에- 나는 내가 만든 다른 트랙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하자. 이것이 바로 내가 살기 위해 마련한 다종다양의 트랙이었으니까. 그때서야 나는 내가 트랙들도 아닌 여기와 저기를 오가는 그 움직임 그 자체임을 알아차릴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