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만났거든 깨어 헤어도 지면서

미당 시전집 강독 11: 『서정주문학전집』에서 세 편

by 노정연

1.


순서상으로 『동천』에 이어지는 서정주의 여섯 번째 시집은 『질마재 신화』입니다. 하지만 이 시집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시기상으로 두 시집의 사이에 해당하는, 1972년에 출간된 『서정주문학전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총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서정주문학전집』은 등단 무렵인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그때껏 발표된 서정주의 거의 모든 시와 산문을 망라하여 수록하고 있는 전집입니다. 이 중 1권이 시집이고, 2권은 평론, 3권은 자전, 4권과 5권은 기타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이 전집은 시인으로서의 광휘 때문에 그동안 가려져 있던 면이 없지 않은, 뛰어난 산문 작가로서의 서정주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3권에 수록된 자서전 『도깨비 난 마을 이야기』와 『천지유정』, 2권에 수록된 평론집 『한국의 현대시』는 그 중 주목되는 글들입니다.


시집이 수록된 1권에는, 발표된 역순으로 『동천』에서 출발해 『신라초』, 『서정주시선』('국화 옆에서'라는 제목으로 실림), 『귀촉도』, 『화사집』에 수록된 시들이 실렸고, 그 뒤의 순서로 기간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1960년대 이후의 시들이 실려 있습니다. 이 시들은 독립된 시집으로는 묶이지 않았다 보니 뚜렷한 주목의 대상이 되지는 못한 편이지만, 좋은 작품을 여럿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사후인 2019년에 이 시들은 『내 데이트 시간』을 표제작으로 삼아 한 권으로 묶여 출간되었습니다.


2.


이 중 첫 번째로 자리잡고 있는 단락은 '예시(禮詩)' 편입니다. 여기에 실린 열여섯 편의 시는 국가 행사나 기념일에 맞추어 쓴 행사시에 해당하고, 사실 그런 만큼 대체로 평범한 작품들이기도 합니다. 초두에 실린 「부처님 오신 날」과 「조국」은 그러한 싱거운 듯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시들입니다. 이 작품들은 다소 평범한 울림을 주고 있다고 하겠지만, 그 속에서도 서정주의 솜씨가 아니면 나타나기 어려울 대목들이 눈에 띄곤 합니다.


50주년과 53주년 삼일절을 기념하여 씌어진 「3.1아, 네 해일 그리며 살았었느니」와 「쉰 세 돌 3.1절에」 역시 그렇습니다. 전자에서 시인은 3.1운동의 힘으로 그 이후의 세월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고, 후자에서는 또 그 속에서도 분단 상황의 아픔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쉰 세 돌 3.1절에」는 서정주의 시에서 분단의 슬픔과 통일의 열망을 노래한 아마도 최초의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10회 현중일을 맞아 씌어진 「영령들에게」 역시 같은 맥락에서의 평범한 울림을 주는 시입니다.


「찬성」, 「신년 유감」, 「바닷물은 반참 때」는 1963년, 1965년, 1969년에 각각 신년시로 씌어진 작품들입니다. 토끼의 해에 맞춰 수궁가의 내용을 풍자적으로 비틀어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찬성」이나, 우리 세대는 몰라도 자식 세대에까지 가치가 무너진 삶을 물려줘서야 되겠느냐고 묻고 있는 「신년 유감」의 내용은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그 외에 어버이날에 씌어진 「어머니」, 한국일보와 전북일보의 창간일을 맞아 씌어진 「찬가」와 「이 신문에서는」, 범산 김법린을 추모하며 쓴 「범산 선생 추도시」 등이 있지만, 앞의 시들처럼 인상적인 몇 대목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범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1966년에 각각 신년시와 광복절 기념시로 씌어진 「말에게 부쳐」와 「다시 비정의 산하에」에서는 베트남전 참전을 지지하는 내용의 구절이 보이고 있어 그의 정치적 성향을 확인할 수 있게 합니다.


「4.19 혁명에 순국한 소년 시인 고 안종길 군의 영전에」는 그 씌어진 계기가 다소 주목됩니다. 안종길이라는 인물은 당시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며 서정주의 문하에서 시를 배우곤 했었는데, 4.19 당시 시위에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었고, 서정주는 그의 유고 시집 발간에 참여함과 함께 이 시를 썼습니다. 이승만의 지지자이기도 했던 그가 이런 작품을 쓴 것은 흥미롭게 여겨지는데, 이는 그가 4.19의 정치적 함의보다도 순수히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원천으로 하여 이 시를 썼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시' 편에서 마지막으로 실린 작품은 「8.15의 은어」입니다. 1968년 광복절에 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시는 해방 후의 우리 정치사의 일면을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아직까지 이 시에 관해서 언급한 평자의 글을 거의 보지는 못했지만,(주1) 제가 보기에는 앞의 시 15편이 지닌 평범성을 모두 뒤엎을 정도로 특이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광복절을 소재로 하면서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특이한 일인 것 같습니다.


스물세 해 전 오늘

미소 양군이 서울역에 내린다고

우리는 흥분해서 환영을 나갔었지.

나는 마포 잠방이 바람으로 미군을 맞으러

옆집 막동이는 나무 샌들 끌고 로스께를 맞으러……

그렇지만 미소 양군은 이날은 없고

한 달쯤 뒤에 서울과 평양으로 나누어서 나타났지.

웃기네.


미소 양군이 우리나랄 신탁통치해 달라고

몽양 여운형이는 대학생을 꼬여 데모를 하고

이 박사와 우리들은 결사반대한다고

사방에서 주먹을 쓰고 싸웠지.

여러 군데 유리창을 마구 잘 깨뜨려 놓았지.

웃기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일에는

키 큰 맥아더 원수의 가슴패기에 안겨서

이승만 박사가 잘 봐 달라고 했었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그렇지만 6.25 사변이 났을 땐

맥아더는 좀 늦게 와서

우리 쓸 만한 인사들은 반나마 평양으로 납치돼 가 버렸지.

처자들은 서울에 두고 함흥차사 되어 가서

빨랫줄에 빨래처럼 매어달려 표백하다가

반쯤은 죽고

반쯤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가?

웃기네.


웃기네.

6.25 사변과 1.4 후퇴의

긴 4년의 피난살이도 피난살이였지만

1960년에 이 박사가 올빼미표 선거를 하게 두고

중고등학생들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총으로 쏘게 한 건

웃기네.


이 민족 제일 원로 이렇게 되신 것

사람 웃기네.


월남에 간 우리 병정들은

그곳 아가씨들이 작별 인사를 물으면

"웃기네"라고 해

헤어질 땐 이 "웃기네"를 안녕히 대신으로 쓴다나.


안녕히,

안녕히,

해방 23년이여

웃기네. 안녕히……


어디서 들은 말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정말로 재능이 뛰어난 예술가들은 색안경을 끼고서도 이상하게 본질을 꿰뚫을 줄 안다는 내용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엉뚱한 방식으로라도 말입니다. 이 시가 딱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작품 속에서 그려진 역사적 사실이 우익 지지자의 입장에서 씌어지지 않았는가의 문제는 시의 전면에 나타나는 냉소적 이미지에 압도되어, 이미 두 번째 문제로 밀려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에 속하면서도 서정주는 한국의 지난 정치적 현실이 우스운 것이었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베트남전쟁에서의 은어 에피소드를 통해, '안녕히'라는 작별 인사의 대상이 될 해방 이후의 23년 세월을 '웃기네'라고 말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두 해 전 자신이 지지했던 베트남 참전 상황을 은근하게 비판할 수 있는 거리를 가질 수 있게 되기까지 합니다. 가히 풍자의 명편이라 부를 만한 작품입니다.


3.


'예시' 편의 다음으로 실린 '근작 시편: 시집 『동천』 이후'에서는 말 그대로 『동천』의 시편들 이후에 씌어진 시 서른여덟 편이 실려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동천』의 작품들에 나타나던 이른바 영원주의의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저의 감상을 하나 덧붙인다면, 여기에 가난과 같은 현실의 직접적 측면을 조금씩 접목시킨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예컨대 「춘궁」 같은 작품이 그렇습니다. 어쩌면 『질마재 신화』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실 관찰의 스타일이 나오기 바로 전 단계가 이런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 작품이 실려 있지만, 편의상 대표적 작품을 위주로 하여 다른 작품들은 간략하게만 언급해 가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순서로 실린 시는 「사경」입니다. 시인은 이 시를 1969년 2월의 새벽 3시에 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고요에/ 묻은/ 나의 손때를// 누군가/ 소리 없이/ 씻어 헤우고// 그 씻긴 자리/ 새로/ 벙그는// 새벽/ 지샐 녘/ 난초 한 송이.' 늦은 밤중에 이루어지는 한 정화의 광경을 그리고 있는 이 시는 「동천」과 거의 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고요 속에 묻은 나의 '손때'는 누군지 모를 이에 의해 씻어지고, 그 행동이 난초의 꽃핌이라는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과 같은 묘사는 서정주의 시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단상」이나 「백일홍 필 무렵」은 이러한 정제된 상황을 그리고 있는 시이고, 「서경」 역시 그러한 장면 속에서 삶의 의지를 다시금 확인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정적인 자세를 유지함으로써 오히려 행동하는 태도를 보여준 승려의 모습을 그린 「방한암 선사」 역시 이러한 정제 속의 행동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시입니다.


행동을 강조하는 또 다른 인상 깊은 시로는 「무궁화 같은 내 아이야」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말하는 듯한 내용의 이 시는 힘든 세상살이 속에서도 다시금 걸어나갈 것을 다짐하는 작품입니다.


손금 보니

너나 내나 서릿발에 기러깃길

갈 길 멀었다만

창피하게 춥다 하랴

아이야

춥거든

아버지 옥양목 두루마기 겨드랑 밑

들어도 서고

이 천역살 다 풀릴 날까지

밤길이건 낮길이건 걸어가 보자.

보아라,

얼어붙는 겨울날에도

바다는 뭍을 뚫고 들어와서

손바닥의 잔금같이

이 나그네의 다리 밑까지 밀려도 드는구나.

아이야.

꿈에서 만났거든

깨어 헤어도 지면서

꿈에서 헤어졌건

생시에 다시 만나기도 하면서,

아이야.

하늘과 땅이 너를 골라

영원에서 제일 질긴 놈이 되라고 내세운 내 아이야.

무궁화 같은 내 아이야.

너를 믿는다.

끝까지 떨어지지 말고 걸어가 보자.


이 시에서 강하게 드러난 행동의 모습은 다소 관념적이긴 하지만 「모란 그늘의 돌」에서도 엿보이고 있으며, 「역사여 한국 역사여」나 「이런 나라를 아시나요」와 같은 시들에서는 그런 행동의 시선을 사회를 향하여 돌리고도 있습니다.


한편 『화사집』에 실린 제주도 시편들을 떠올리게 하는 「한라산 산신녀 인상」과 『신라초』에서의 작품에 이어지듯이 '선덕여왕의 말씀 2'라는 부제가 붙은 「우리 데이트는」은 서정주의 이전 시집과 연관된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눈길이 가는 작품들입니다.


열두 번째 순서로 실린 시 「내 아내」는 사발에 냉수를 올려 기도 드리는 아내의 모습에서 모티프를 얻어 씌어진 작품입니다. 당시 시인의 아내는 방황하는 기질이 심한 남편을 걱정하여 새벽마다 사발에 냉수를 담는 행위를 십 년 넘도록 지속해 왔고, 서정주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내에게 소홀히 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주2)


나 바람나지 말라고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 놓은

삼천 사발의 냉숫물.


내 남루와 피리 옆에서

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

항시 숨 쉬는 그 숨결 소리.


그녀 먼저 숨을 거둬 떠날 때에는

그 숨결 달래서 내 피리에 담고,


내 먼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

내 숨은 그녀 빈 사발에 담을까.


시 속에서는 아내를 '사발'에, 시인인 남편 자신을 '피리'에 비유했습니다. 화자는 우직하고도 견실한 아내의 '사발'의 힘과 남루 속에서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자신의 '피리'의 힘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두 사람 중 하나가 먼저 떠나더라도 그 숨결은 서로의 피리와 사발 속에 남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년의 담백하고도 아름다운 사랑 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시 「뻐꾸기는 섬을 만들고」에서, '뻐꾸기'는 그런 피리 소리의 역할을 합니다. 시 속에서 뻐꾸기는 바다를 만들어 속된 것을 떠내려가게 만든 다음, 그 자리에 아름다운 것들로 섬을 만든다고 말해집니다.


「보릿고개」와 「춘궁」은 시인의 말마따나 '이 무렵의 공기 속에서 우리가 공감 안 할 수 없는 가난의 서러움을 다룬'(주3) 작품들입니다. 이 속에서 그는 가난의 아픔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의 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시 「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총소사 때의/ 탄환들같이/ 벽도/ 인육도/ 뼈다귀도/ 가리지 않고 꿰뚫어 내리는/ 꽃'을 부르고 있는 이 작품은 모든 현실적 제약을 관통하는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또 다른 시 「음력 설의 영상」과 「나룻목의 설날」은 이렇듯 가난에 고통받는 화자가 그릴 만한, 따뜻하고 얼마쯤 이상적인 현실의 풍경을 그리는 시입니다.


가랑잎이 나부끼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그때가 곧 데이트 시간이 된다고 하는 내용의 「내 데이트 시간」과 예쁜 여자와 둘이서 목욕을 하면서도 일말의 성욕도 일어나지 않더라고 말하는 화자가 등장하는 「백월산찬」은 초월적 정신을 유쾌하게 표현한 작품들이라고 생각되는데, 사실은 『삼국유사』의 일화에서 따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화의 내용을 거의 지운 채 시인이 거기서 얻은 생각들을 바탕으로 시를 만들고 있습니다. 4~5행의 소품인 「할머니의 인상」과 「남해 보타낙가 산정」도 잘은 모르겠지만 이와 비슷한 맥락의 시들인 것 같습니다.


스물세 번째 순서로 실린 「소연가」는 『대동운부군옥』에 실린 석남꽃 이야기를 바탕으로 씌어진 작품입니다.(주3) 이 시의 내용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를 거꾸로 한 것 같습니다.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내가 죽으면/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너도 죽어서……/ 너 죽는 바람에/ 내가 깨어나면/ 내 깨는 바람에/ 너도 깨어나서……/ 한 서른 해만 더 살아 볼꺼나./ 죽어서도 살아나서/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한 서른 해만 더 살아 볼꺼나.' 앞서 본 「내 아내」가 현실에서 피어난 연가라면, 이 시는 설화에서 피어난 연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뒷 순서로 실린 작품들은 다채로운 소재들이 등장하고 있어 재미를 줍니다. 「애기의 웃음」이나 「첫 벌 울음소리 바윗가에 들려서」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느낌을 주는 시들이고, 「기억」이나 「무제」는 연모하는 이를 담백한 멋으로 그리고 있는 작품들입니다.


각각 어부와 석공과 승려의 말씨를 빌어 삶의 태도를 노래하는 시들인 「겨울 황해」, 「석공 1」, 「어느 신라승이 말하기를」 역시 인상적인 시들입니다. 「추운 겨울에 흰 무명 손수건으로 하는 기술」은 연극투의 화법을 접목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소박한 에피소드 속에 초월의 이미지를 담은 「내가 심은 개나리」와 「무제」 역시 은은한 여운을 남기는 시들입니다. 이 중 「내가 심은 개나리」의 모티프가 된 일화는 이후 『안 잊히는 일들』에 실린 「내 뜰에 와서 살게 된 개나리 꽃나무 귀신」으로 다시 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조 백자를 보며」와 「초파일 해프닝」, 「남은 돌」은 그 의미가 얼른 이해되지는 않는 시들이고, 마지막으로 「바위옷」과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는 과거의 풍경을 환기하면서 현재의 삶을 담담한 듯이 되돌아보고 있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근작 시편'의 다음 순서로는, '질마재 신화' 연작의 첫 9편의 시(「신부」에서 「내가 여름 학질에 여러 직 앓아 영 못 쓰게 되면」까지)가 실려 있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 발표되기 시작해 이후의 서정주 시의 새롭고 독특한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하는 이 작품들은 당시 아직은 그 초반부만이 씌어지고 있는 중이었고, 이후 그의 다음 시집인 『질마재 신화』에서 모두 묶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의 어느 단락에도 수록되지 않는 마지막 순서로 한 편의 시, 「밤에 핀 난초꽃」이 실려 있습니다. 서정주가 왜 유독 이 작품만을 따로 떼어놓아 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근작 시편'의 첫 번째 시인 「사경」과 시적 장면의 이미지에 있어서 수미쌍관을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철저하게 정제된 풍경을 보여주는 「사경」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피는 난초꽃을 중심으로, 돌에서부터 날아오르는 나비 떼에서 뻐꾸기 소리를 거쳐 '고요의 바닷바닥'에 가라앉는 루비로 이어지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1) 제 기억으로는, 이영광 시인이 쓴 『미당 시의 무속적 연구』(서정시학, 2012)에서 약간 비판적으로 언급된 것을 제외하면, 보지 못했습니다.

2) 서정주, 「내 아내 방옥숙」, 『나의 시』(전집 11권, 은행나무, 2017).

3) 서정주, 「석남꽃 이야기」, 위의 책.

keyword
이전 11화비 개인 아침 해에 가야금 소리로 피는 꽃을 아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