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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연 Aug 11. 2022

인용문 단장 (7)

1. 심적 능력으로서 하는 욕설에는 등신, 천치, 바보, 혼빠진 놈, 정신없는 놈, 똥단지 등이 있다. 이것은 상대자의 두뇌의 우둔에 대하여 가하는 모욕이며 똥단지란 것은 인분제조기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2. 행위ㆍ행동으로써 하는 욕설에는 소같은 놈, 돼지같은 놈, 고양이같은 놈, 원숭이같은 놈, 쥐새끼같은 놈, 곰같은 놈, 구리같은 놈 등이 있다. 이것은 상대자의 미련, 우둔, 빈욕(貧慾), 불륜(不倫), 교활, 음험한 행위며 행동에 대한 모욕이다.


(…) 13. 성(姓)으로써 하는 욕설은 대개 맹세에 쓰는 것으로 예를 들면 '내기 시행을 안 하면 김가로 변성(變姓)을 하겠다'라든지 '내 말이 거짓말이면 내 성이 박가일다'라고 하는 등이 그것이며(이것은 자기 자신에 가하는 욕설이다) 김가에 향하여 박가라고 하던지, 이가를 안가라고 함도 물론 대욕이 된다. 이것은 성씨를 몹시 중시하고 혈족관계를 극단히 타(他)와 구별한 근세의 소산일 것이 명백하다.


얼른 생각나는 것만을 적어 보아도 한국의 욕설은 그 수가 벌써 일백오십여 종에 달한다. 이외에 빠진 것도 상당히 있을 터이니 상세히 조사를 한다면 우리 민족은 아마 세계의 유수한 욕설 소유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욕설 많은 것이 반드시 민족적 치욕도 될 것도 없으며, 나는 이 점을 잡아 '욕설을 하지 말라'고 도덕적 강화(講話)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나는 우리의 욕설을 통하여 민속학적으로 무슨 발견을 할 수 있으며 사회학적으로 이에 대하여 무슨 추론을 할 수 있는가를 잠깐 고찰하여 보고자 함에 불과하다.


- 손진태, 「조선욕설고」, 『손진태선생전집 6』(태학사, 1981)




서양의 문화적 전통을 힐끗 엿보면서 받았던 인상의 하나는 지식인이며 예술가들이 누군가를 비방하는 일에 전혀 개의치 않을 때가 많으며 대체로 그것을 풍자 정신이라는 미명 아래 정당화하고 있는 것만 같다는 것이었다. 그쪽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주제에 이런 발설을 한다는 것은 망언 행위이겠지만 내 느낌으로는 그랬다. 가령 『파우스트』 첫 권의 후반부에는 '엉덩이심령술사'라는 이상한 이름의 인물이 잠깐 등장하는데 이것은 괴테가 자신을 비판했던 다른 작가를 조롱할 목적으로 등장시킨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듣고 작가의 독함에 혀를 내둘렀다. 누군가를 비방하는 최고의 방법은 천하의 명작 속에 그를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등장시키는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욕설 하나 섞이지 않은 풍자가 그 어떤 욕설보다도 더욱 욕설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데 대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풍자 언어야말로 욕설 중의 욕설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것은 욕설이 태생적으로 비방을 위해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해학적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는 것을 떠오르게 하면서 일종의 모순적인 기분을 갖게 했다. 왜 이런 모순이 일어나는가? 개인적으로 그것은 말뜻의 가변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욕설은 평상시에는 그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냥 그렇게 생긴 말일 뿐이다. 그러다가 누군가에게 대고 뱉어낼 상황이 될 때 비로소 뜻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언어적 특성 때문에 욕설의 말값은 쓰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정말로 악의를 지닌 욕설이 있는가 하면 가령 친구에게 대고 미친 놈이네, 지랄을 하네 하는 말을 던져 놓고선 서로 낄낄대는 것과 같은 악의 없는 욕설 뱉기의 상황이 가능해진다. 욕설을 해학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이렇듯 상황적인 악의를 벗어난 상태에서 그것을 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악의를 가진 욕설이라 할지라도 상황이 희미해지면 그 뜻은 휘발된다. 그것은 한번 쓰고 버리면 언젠가는 시간의 풍화에 의해 썩어 없어지는 쓰레기와 같다.


한편으로 풍자의 언어는 처음부터 상황을 특정한 채로 기록되는 악의의 언어이다. 상황을 특정한다는 것은 비방의 맥락을 콱 잡아둔 채 놓지 않는다는 것이고, 기록된다는 것은 그 비방을 각인시키기 위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풍자의 언어는 휘발하지 않는 악의를 담고 있기에 휘발성이 강한 욕설보다도 오히려 더욱 욕설의 의도를 잘 담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 자신이 풍자 문화에 대한 반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 풍자 언어가 욕설보다 더욱 욕설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예전부터 내심으로 느껴 왔던 감정이기도 했다. 머리가 크면서부터 풍자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갖은 정치 비방의 향연을 목도하며 자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린 눈에도 불쾌해 보였고 지금의 눈으로도 그렇게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그런 기억들 때문에 풍자에 대한 내 인식이란 처음부터 정도 이상으로 나쁘게 각인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기실 풍자에는 원래부터 공격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따라서 풍자 정신은 기본적으로 비방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풍자가 정당한 비판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근대에 이르러 사람들의 사회적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해 비방의 위험성을 얼마간 감수한 선택이었다고 여겨진다. 그 점에서 보면 풍자 문화가 서양에서 크게 활성화된 것도 충분히 이해되기는 한다. 기실 재치 있는 풍자는 순기능을 발휘하여 그대로 당대의 문화적 기여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가령 쿤데라의 풍자는 풍자에 대한 부정이 지닌 엄숙주의의 위험성을 그대로 까발려 주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비방의 위험성을 인정한 딱 그만큼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 부작용은 이미 근대 당시에 벌어졌던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 대정변(大政變) 이후가 되면 책과 언론을 통해 기득권층을 비방하기 위한 별의별 희한한 욕설이 다 튀어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미술의 경우 비방하려는 인물의 외모를 심하게 일그러뜨리는 것은 기본이고 외설적인 풍자도 곧잘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왕조에서 더러 그것을 그럴듯하게 규제하고 싶어하기도 했지만 당시나 오늘날이나 그 행동들은 웃음거리로 여겨지기가 일쑤다.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권력자라는 하층 신분에 갇힌 이상 애당초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물론 당대 사회의 모순을 안다면야 그런 비방들이 정당화되고도 남음이 있겠지만, 기탄 없이 말한다면 내가 당사자라도 최소한 기분은 상했으리라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실제로 당시에 쏟아졌던 풍자 작품들 중에서 정말로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기여를 하고 있는 사례가 얼마나 될지를 생각해보면 주저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풍자 작품에서 비판이라는 미명을 걷어내고 나면 재치는커녕 고약한 기분을 느낄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뒷날의 눈으로 봐서 그렇지 당대에는 통쾌하지 않았겠느냐는 항변이 있을 수 있겠으나 나름대로 풍자 문화라는 것을 정면으로 경험해본 입장에선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 요컨대 그것은 풍자를 내걸고 욕설만 퍼붓는 양두구육에 가깝다. 친구들끼리 모인 데서 씹어 뱉고 마는 휘발하는 욕설이라면 몰라도 이런 것은 수백 년 뒤 사람에게까지 불쾌감을 주는 썩지도 않는 쓰레기에 가까우니 더욱 아니꼽게 여겨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다시피 풍자 문화의 위험성은 그야말로 욕설 범벅에 불과한 것을 작품연하게 행세하도록 만들어주고 또 그런 것들을 아주 범람하게 만든다는 데에 있다. 표현의 자유에 기반한 문화이므로 단속도 불가능하고 사람들의 자정 능력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이러한 자율적 자정 과정이 엉망진창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근대의 풍자 정신이 현대에 계승되어 문화적 기여를 남기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앞에서 말한 영양가 없는 풍자 또한 고스란히 계승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유감스럽다. 비방에 대한 당시의 당위성이 현재도 축소 없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더구나 국가의 모든 권력이 군중으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지나치기 어려운 요즘 같은 세상에서 과거의 비방 방식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은 자멸의 지름길일 것이다. 풍자 작가들의 창작에 대한 보다 깊은 고민이 요망된다. 풍자 정신을 방패로 욕설과 다름없는 말들을 정제 없이 흘려 대는 것은 예술적인 기여는커녕 썩지 않는 쓰레기만 더하고 마는 문화적인 환경 공해일 것이다.


위의 글은 손진태의 전집에서 가져온 것인데 논문보다는 에세이에 가까운 글이다. 세로쓰기의 영인본으로 되어 있긴 하나 그의 전집은 두꺼운 책으로 여섯 권이나 되고 이후에도 유고집이 서너 권 정도가 더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불과 오십여 해를 살았던 그가 이렇게나 많은 글을 썼다는 것을 깨닫고 새삼 놀랐다. 흔히 농담으로 한국어에는 욕설이 많다는 얘기를 하는데 위의 글은 실제로 그 전거가 되고 있어서 재미있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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