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戴記)에 '예기(禮記)에도 없는 예는 속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하였는데, 바로 우리 황제야말로 아우와 누이동생을 어루만짐에 곡진하게도 은정이 있었다. 우리 전하(영친왕)께서 오래 일본에 머무심에 덕혜옹주께서 따라가 있었는데, 황제께서는 마음에 늘 차마 못 잊어 하셨다. 올(1926) 2월에 우리 전하와 옹주가 돌아와 황제를 뵙게 되자, 급히 아우 강(堈)을 불러 들이셨다. 그때 황제께서는 병환이 좀 너누룩하여 애써 일어나 앉아서는 몹시 반가워하셨다. 이윽고 아우와 누이를 둘러보더니만, 고종을 생각하는 슬픔이 얼굴에 떠올라 한참만에야 그 빛이 가시었다.
(…) 인륜을 중히 여기고 명분을 엄격히 하였으므로, 대궐 안에 신문이 흘러들 적마다, 부자간의 어그러짐, 아낙네의 행실이 얌전치 않음을 보고는 문득 낯빛을 변하여 한숨짓곤 하였다. 더구나 곧은 선비가 떠돌아다니며, 잘난 백성이 제자리를 잃은 것을 크게 슬퍼하여, 얼마가 지나도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히지를 못하였다. 몸이 위독한 가운데 때때로 홀로 한숨짓기도 하였고, 더러는 뇌이고 되뇌이되 대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데, 어떤 때는
"난 예 있기 진저리가 나, 난 너무 괴롭기만 해."
하는 소리가 들리건만 또한 당신은 의식하지 못하였다.
- 정인보, 「유릉지문(裕陵誌文)」, 『담원문록』(정양완 역, 태학사, 2006)
주워 듣기로 맬컴 엑스는 케네디의 암살 사건에 대한 논평을 묻는 질문에 자업자득이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가 대단한 뭇매를 맞은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는 당시 미국의 사회 문제에 대해서 엄청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뭘 그럴 필요까지야 있나 싶지만, 한편으로 가끔씩은 나도 누군가를 두고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를 향해 모진 말을 해도 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그가 그런 말을 들어도 싸다고 생각하는 데에 논리의 근거가 있다. 실제로 모진 말을 들어도 싼 사람들은 세상에 널렸으며 그래서 오늘날에는 그것이 많이 정당화되고 있는 것 같다. 반대로 모진 말이 나오려는 것을 막아주고 말의 날카로움을 깎아주는 기능을 하는 것의 하나로서 우리는 예의의 문제를 들 수 있다. 그것은 옛날의 유교 문화가 지녔던 미덕의 하나이기도 하다.
예의의 문제는 그것이 대상을 막론하고 차려야 하는 것이라는 데에 있다. 이것은 장단점을 모두 가진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단점만이 부각되어 이야기되는 듯하다.
오늘날 예의의 원리는 다소 억지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특히 '반(反)유교를 국시로 한다'는 암묵적인 강령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예의에의 절대적인 강조는 당사자로 하여금 어떤 희생을 권하는 장치로 작용하기가 쉽다. 또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싼 사람에게 부득불 예의를 차리는 옆사람을 보면 그를 은근한 동조자로 느끼게 되기도 하며 실제로 그러한 동조의 분위기가 도출될 때도 없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자신 또한 모진 말을 들어도 싼 사람의 부고를 보고 명복을 빈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는 않는 것 같다. 우물쭈물하면서 침묵이 금이라는 말에만 속으로 동감할 뿐이다.
예의가 가지는 긍정적인 기능은 말과 행동의 정제와 그로부터 생기는 객관적 비판의 가능성이다. 예의를 차리고도 비판은 가능하며, 오히려 예의를 갖추었을 때에야 좋은 비판은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예의를 차려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 차이가 있겠지만, 하여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최소한 모진 말로는 연결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를 너무 간과하는 데에서 이른바 선택적 예의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유교 문화의 폐단이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요컨대 자신이 생각하는 옳지 못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나 쉽게 그 대상에 대한 증오나 경멸의 감정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오늘날 배포되고 있는 시의적 성격의 글들을 보면서도 적지 않게 이와 유사한 한계를 느끼곤 한다.
위의 글은 순종 황제의 사망 직후 정인보가 청탁을 받아 쓴 것으로 내가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의 묘지명(墓誌銘)으로써 씌어진 글이다. 인용 내용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일화 속에서 순종은 무엇보다도 예를 극진히 지키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의 예는 물론 내적인 것이고 외적으로는 뻗어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당대의 누구에게나 그것은 이해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병약하고 소심하되 일탈하지 않는 그의 성격은 강제 즉위 이후 극히 좁아진 운신의 폭과 맞물리면서 자꾸만 내적인 예의의 철저함으로 자신을 몰아 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이로 인한 무의식적 괴로움의 토로에 대한 일화는 사실이 아니었다면 여기에 씌어지지도 않았을 언급이라고 보여진다. 순종의 일화들은 여러 모로 착잡한 심정을 느끼게 하지만 내적으로라도 깨끗함을 잃지 않고자 한 그의 삶의 태도는 충분히 미담으로 받아들여질 만하다고 역설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