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유일한 죽방렴에서 잡은 멸치의 힘. 남해 멸치회와 멸치쌈밥
요즘은 모두들 '휴가'를 떠나지만, 초빼이가 어린 시절엔 모두들 여름방학이면 항상 '바캉스'를 갔다. 이름도 잊지 않는 아버지의 갈색 '제미니' 자동차에는 커다란 냄비며 버너, 아이스박스 그리고 물놀이용 튜브까지 실었으니 사람이 타야 할 뒷좌석의 일부마저 짐들에 내줘야 했다. 그나마 7살 차이가 나던 형은 부모님과의 여행에는 따라나서지 않아 뒷좌석의 일부지만 꽤 편하게 탈 수 있었던 것 같다. 고향 마산에서 자주 찾았던 바캉스 장소는 남해의 상주 해수욕장이나 거제도의 구조라 또는 와현 해수욕장 같은 곳들이었다. 부산의 해운대는 딱 한번 갔었는데 "사람이 너무 많고 물가도 비싸" 이후로는 찾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남 마산에 살던 내게 남해도(남해군 남해도를 칭함. 이후 남해)는 항상 즐거운 곳이었다. 해수욕장은 언제나 즐거운 물놀이가 가능했고, 간혹 캠핑을 할 땐 모닥불도 피울 수 있었다. 가끔 민박집에서 묵을 땐 매 끼니마다 차려주던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의 맛있는 식사도 기다리고 있었다. 불교신자이던 어머니를 따라 금산의 보리암까지 오르며 힘들다고 투덜거리던 기억도 있다. 그 시절 남해의 멸치는 값싼 국물을 내는 그런 조미료와 같은 수산물에 불과했었다. 쌈밥은커녕 멸치회는 사실 구경할 수도 없었고 조림도 보기 힘들었다. 어쩌면 뱃사람들이나 어촌에 살던 사람들의 흔한 식사거리였기에 관광객들에게 내놓을 상품적 가치는 없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 여하튼 초빼이의 꼬맹이 시절에는 멸치회나 멸치조림 같은 음식을 사 먹었던 기억은 없으니 요즘처럼 대중화되지 않았던 음식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4~6월이 제철인 멸치(대멸)는 남해(도)를 대표하는 특산품이다. 주로 나는 곳은 남해군과 삼천포(지금의 사천시) 등이었다. 사실 삼천포는 예전엔 멸치보다는 양질의 쥐포를 생산하는 곳으로 더 유명하기도 했다. 남해군을 이루는 남해도와 창선도 사이를 지족해협(只族海峽)이라 부르는데, 이곳은 물살이 빠르고 조수 간만의 차가 커 고유의 어업방식인 죽방렴 어업에 맞는 조건을 갖췄다. 섬과 육지사이의 해협에 'V'자 모양으로 대나무 발 그물을 설치해 해류를 따라 오가는 물고기를 잡는 것이 바로 죽방렴(竹防簾)이다. 굉장히 오래된 원시어업 형태의 하나로 지금은 전국에서 죽방렴을 써 어업을 하는 곳은 남해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3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지는 죽방렴 어업의 산물은 사실 멸치만은 아니다. 4~8월 사이에는 멸치와 갈치, 학꽁치, 장어, 도다리, 농어, 감성돔, 숭어, 보리새우 등 다양한 어종이 잡히는데 이 중 80% 이상을 멸치가 차지한다고 한다.
일반 그물로 잡는 멸치는 한 번에 많은 양의 멸치를 잡아 올리기 때문에 멸치의 표면에 상처가 많이 생긴다. 그에 반해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는 일일이 뜰채로 떠서 옮기기 때문에 멸치의 몸체에 손상이 적어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주낙으로 잡는 은갈치와 그물로 잡는 먹갈치의 상품성과 가격차이 같은 것이라 할까? 죽방렴 멸치 또한 일반 그물로 잡은 멸치와 상품성과 가격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얼마 전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죽방렴 멸치의 가격이 1백만 원이 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정도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귀한 죽방렴 멸치가 어느 순간 밥상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멸치회'와 '멸치쌈밥'이라는 이름으로 남해를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초빼이가 마산을 떠난 후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음식이라 멸치쌈밥이나 멸치회는 초빼이도 아직 제대로 먹어보지 못한 음식. 평소 꼭 한번 먹어봐야겠다 생각해 둔 터라 목포 출장을 마치고 마산으로 이동하는 도중 남해군으로 잠깐 차를 돌렸다. 몇몇 유명 식당을 미리 알아두었는데 그중 한 곳을 골랐다. 한동안 방송에 오르내리던 남해 '독일마을'의 입구에 있는 동천식당이 바로 그곳.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는데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밖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다행히 일찍 오신 분들이 금세 빠져나가 기다리는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혼자 왔는데 먹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어서 들어와 앉으라고 하신다.
나만 유일하게 혼자 찾은 손님이라 그런지 식사 중이던 사람들이 모두 한 번씩 눈길을 던지기 시작한다. 스스로 어깨를 더 펴고 허리를 곧추 세우며 더 당당하게 앉는다. 그 눈길이 잦아질 무렵, 멸치쌈밥 세트 2인분을 주문했다. 그랬더니 사장님께서 "혼자 온 거 맞지예?"라고 물으셔서 "쌈밥과 멸치회 무침을 둘 다 먹고 싶은데 세트 메뉴는 2인분 이상 주문해야 된다고 적어 놓으셔서..."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아이고 그냥 제가 1인분 해 드릴께예"하고 주방으로 "쌈밥세트 1인분만 해 주이소"라고 주문을 넣는다. 자본주의의 유혹을 뛰어넘는 시골 밥집의 너그러움에 음식을 먹기도 전에 감동받았다. 이런 유명한 식당에서 '1인 손님'은 사실 그리 달갑지 않은 손님이다. 2~3인에게 내 줄 찬을 한 사람에게 같이 내주는 것도 손해이지만 한 사람이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게 되면 밖에서 기다리는 웨이팅 손님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식당 사장님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 그런 사정을 익히 이해하기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연달아 드린다.
음식이 나오기 전 다른 손님들을 보니 특정한 패턴이 있다. 식당을 채우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손님들이 초빼이와 같이 멸치 쌈밥을 주문해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간혹 해물전골이나 소 내장전골을 드시는 분들도 보였다. 나중에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 알게 되었는데 동천식당에서 멸치 쌈밥을 먹는 사람들은 99.9%가 관광객인 가능성이 많다고 하며 다른 메뉴를 드시는 분들은 현지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외지인과 관광객의 구분을 먹고 있는 음식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꽤 흥미롭다. 초빼이 바로 옆 테이블의 아주머니 두 분도 해물전골을 드시고 계셨는데 두 분께서 나누는 이야기기 내용과 오랜만에 듣는 나긋나긋하지만 찐한 경상도 사투리로 짐작건대 인근 주민인 것 같았다.
테이블에 금세 찬이 올라왔다. 모두에게 익숙한 오뎅볶음이나 김치류 등의 찬과 함께 타 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석묵(해조류)과 우무묵이 눈에 들어온다. '석묵'은 초빼이도 처음 보는 음식이라 바쁘신 사장님을 붙잡고 여쭤보았는데 남해군의 특산품 중 하나로 굉장히 식감이 독특한 해조류였다. 해조류 특유의 식감과 향이 잔잔하게 느껴지는데 이전에 맛보았던 '꼬시래기'보다는 조금 더 가늘고 부드러운 식감이 나쁘지 않았다. '우무묵'도 타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찬 중의 하나이다. 경상도에서는 가늘고 길게 썰어 콩물에 타고 채 썬 오이를 올려 여름철 간식으로 많이 먹는 음식이다. 이런 우무를 도토리 묵처럼 큼직하게 잘라 칼칼한 간장 양념을 뿌려 내는데 식감이 일반적인 묵(도토리 또는 청포)보다 경쾌하고 가벼워 입에 맞는다. 거의 경상도에서만 이런 반찬으로 먹기 때문에 초빼이도 십몇 년 만에 먹어보는 것. 방아잎이나 깻잎을 잘게 썰어 올리면 더 맛있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방장님의 손맛이 의외로 좋다.
멸치회가 바로 뒤를 이어 나왔다. 멸치는 워낙 성격이 급한 물고기라 물 위로 올리는 순간 바로 부패가 시작된다. 그래서 멸치회는 사실 멸치의 주산지가 아니고서는 먹기 힘든 음식. 이런 이유로 멸치회는 보통 초고추장에 갖은 채소와 함께 버무려 접시에 올린다. 제대로 된 식감과 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멸치 중에서도 씨알이 굵은 대멸(大蔑)을 사용한다. 대멸은 4~6월이 가장 제철이다. 그 이상 넘어가면 뼈가 굵어져 입 안에서 거슬리기 시작한다. 어른 손가락 크기의 대멸이라야 제대로 된 식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양배추, 미나리와 함께 멸치회를 집어 입에 넣는다. 입안에 들어가기도 전 코 끝에서부터 새콤달콤함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멸치는 크기는 작지만 등 푸른 생선의 일종이라 자체적으로 품고 있는 기름기에서 느낄 수 있는 고소함과 담백함이 있다. 입 안을 몰아치는 초고추장 맛이 한 풀 꺾이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생멸치가 품고 있는 고소함과 담백함이 모습을 드러낸다. 좋다. 막걸리 한 잔만 곁들이면 참 좋을 맛이다.
향이 좋은 깻잎에 멸치회를 올려본다. 그 위로 오늘 처음 만난 '석묵'도 함께 올려 입에 넣는다. 익숙한 남해 바다가 눈앞에서 넘실거린다. 짙은 소금기를 품은 바다의 공기도 함께 느껴진다. 가끔 어머니 집을 찾기 위해 마산에 내려오면 고속도로 출구에서부터 맡을 수 있는, 남해 바다의 향을 오랜만에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남해의 고요한 바다와 섬들이 입 안에서 살아 숨 쉰다. 문득 정명훈 선생이 자주 레퍼토리로 지휘했던 드뷔시의 바다가 떠 올랐다. 바다(La Mer) 1악장이 잔잔하게 연주되고 있는 느낌이다. 잔잔한 새벽바다의 물결과 같다. 오늘의 선택이 전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 한 입의 멸치회 쌈으로 비로소 깨닫게 된다.
시간차를 두고 나온 멸치조림을 가스불 위에 올린다. 우선 강한 불로 화끈하게 끓여야 한다. 고요하던 테이블 위로 뜨거운 열기의 폭풍우가 몰아친다. 조림 냄비가 끓기 시작하면 그때부터가 중요한 순간. 2~3분여를 더 끓여야 한다. 그런 후 불을 줄여 은근한 불로 끊임없이 이 녀석을 닦달해야 한다. 조림 냄비 속에서 남해 바다의 '대멸'이 요동치며 파닥인다. 각종 채소와 정어리만 한 대멸이 품고 있는 깊은 바다의 맛은 이렇게 끄집어낸다. 그래야 맛이 무르익는다. 칼칼한 경상도식 양념이 불에 졸아들면서 기막힌 향을 피워 올린다. 양념들이 졸아 조림 냄비의 옆면에 눌어붙기 시작하면 그때가 멸치조림에 젓가락을 댈 수 있는 시간. 멸치조림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연약한 멸치의 은빛 껍질에 상처하나 찾을 수 없다. 죽방렴에 갇힌 멸치를 조심스럽게 뜰채로 수십 번을 걷어 올렸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멸치조림은 하얀 쌀밥에 가장 잘 어울린다. 은빛 찬란한 멸치 한 마리를 집어 밥숟갈 하나에 올려 먹으면 그런 별미가 없다. 성스럽게 빛나는 은빛 몸체가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성수(聖獸)를 보는 듯하다. 뜨거운 밥 알갱이들이 멸치조림의 향을 더욱 돋우고 탄탄해진 멸치의 살결이 입 안에서 바스러지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오랜 시간 불에 끓이니 멸치살이 단단해졌다. 마치 꽁치나 고등어 살을 씹는 듯한 식감과 향마저 난다. 입안에 조금씩 느껴지는 멸치 잔가시의 존재감에 내가 멸치를 먹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소함을 넘어 구수하기까지 하다. '왜 초빼이가 마산에 살던 시절엔 이런 음식들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예전에 멸치 회무침과 멸치조림의 맛을 알았더라면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인천이 아니라 남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매력적인 음식이다.
어떤 이는 워낙 멸치의 크기가 작아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없다고도 하지만 그 말은 진정 어불성설이다. 멸치의 크기가 작다고 몇 번 씹다가 금세 목으로 넘기면 안 된다. 오히려 작은 체구의 생선이기에 집중하며 오래 씹어야 한다. 멸치의 잔가시도 입안에서 느끼고 가끔 느껴지는 꼬리지느러미의 식감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입안에서 고소하고도 담백한 맛이 퍼져 나간다. 이 맛이 아마도 멸치의 진정한 맛일 게다. 유럽의 엔초비도 먹기 전 코를 괴롭히는 비린 향을 참고 입에 넣은 후 오래 씹어야 제대로 된 고소함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멸치는 그런 생선이었던 것이다.
너무나 생소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접한 나머지 일일이 사진을 찍고 멸치 한 마리씩 들어 입에 넣고 음미하고 있자니 사장님과 직원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낯선 이방인이(그것도 아재 혼자) 그들의 음식을 음미하고 즐기는 모습을 보며 그분들도 행복했으리라. 자신들의 요리를 이렇게 애지중지하며 사진에 담고, 하나하나 세심하게 맛을 보는 모습을 보며 귀찮아도 1인 분의 세트 메뉴를 내 준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음식을 내는 이의 정성도 중요하지만 그 음식을 먹는 이의 마음가짐과 자세도 중요하다. 음식을 먹는 것도,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도 어찌 보면 같은 결을 가진, 나와 타인 간의 상호 작용과 같은 것이다.
모든 그릇을 설거지하듯 비우고 가게 밖을 나와 마을길을 잠시 걸었다. 시골의 작은 마을 풍경 속을 걷고 있자니 마음도 편안해진다. 건어물을 파는 가게 앞에서는 잠시 발길도 멈췄다. 조금만 시간을 내 고속도로를 벗어나도 도시의 삶과 전혀 다른 시골의 마을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이다. 귀에 익숙한 도시의 소음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백색 소음 속 고요함이 살아있다. 눈도 귀도 마음에도 오랜만의 휴식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멸치회 무침과 멸치조림이라는 음식으로 입도 호사를 누렸다. 모든 게 평온하다.
* 참고 : 오늘은 개인적인 일(장인어른의 기일)이라 장인 어른을 모신 수목장 방문을 위해 조금 일찍 글을
올립니다.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메뉴추천]
1. 1인 방문 시 : 멸치쌈밥세트(1 또는 2 중 선택, 2인 이상 주문) + 막걸리
2. 2인 이상 방문 시 : 멸치쌈밥세트 2인 + 해물뚝배기(또는 해물전골) + 막걸리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전용 주차장 완비. 식당 앞과 옆면 전용 주차장 있음. 단 식사시간엔 자리가 없을 수 있다.
2. 월~일 09:00~20:00
3. 참고
- 세트메뉴는 기본 2인분 이상 주문해야 함. 초빼이의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음. 식당에서
정한 기본적인 룰은 가급적 따를 것.
- 현지인들의 경우 해물전골이나 불낙전골 등을 주문함. 멸치회나 쌈밥을 많이 먹어본 분이라면 현지인
들의 메뉴를 주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화랑갈비, 부일반점, 우리식당, 아느로식당, 원천횟집, 재두식당, 초량정, 미조항식당, 부산
횟집, 동천반점, 단골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