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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빼이 Aug 22. 2024

목포에선 간짜장도 디저트가 된다.

125. 초빼이의 노포일기[전남 목포시 상락동 중화루]

우리나라에 중국음식은 언제 처음 들어왔고 대중화되었을까? 


중국인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으로 진입한 청나라군과 함께 온 청나라 상인으로 추정된다(이와가 가즈히로, 중국요리의 세계사, 도서출판 따비). 많은 이들이 이 시기를 한반도의 중국요리 진출 시기와 거의 동일시한다. 인천과 경성을 중심으로 생겨났던 중국 음식점은 개항장이 늘어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 기간 동안 많은 수의 중국인들이 이북에서 넘어오고, 남쪽으로 피난하며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그러면서 그 지역에 자리를 잡고 중국집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1900년대 초) 중국음식은 귀하고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여겨졌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부 중국집은 독립운동가들의 아지트가 되기도 했다. 1950~60년대에도 중국집은 여전히 고급 음식이었고 그 수가 4천여 개에 이르렀으며, 흔치 않은 외식의 주 목적지가 되었다. 1970년대 접어들어 박정희 정권의 여러 정책과 '외국인 특별 토지법'에 의해 외국인은 50평 이상의 점포, 200평 이상의 주택용지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키는데 화교들이 운영하던 중국 음식점은 이 시기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런 화교들에 대한 정책은 결국 1970년대 화교들의 '엑소더스(Exodus, 대탈출)'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영등포의 오향장육 전문점 '대문점'의 초대 사장님이라고 할까?) 


그런 어려운 시기를 꿋꿋이 인내하며 영업을 지속해 온 중국집들도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동해시의 덕취원과 목포시의 중화루가 대표적인 사례. 오늘 소개할 집은 목포시 구도심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중화루다. 워낙 면요리를 좋아하는 초빼이는 전국, 아니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그 지역의 면요리를 먼저 찾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 덕분에 전국 방방곡곡 숨어있던 다양하고 특색 있는 면요리를 경험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목포에서는 '중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중화루를 찾으면서 가장 처음 가졌던 의문은 "'중깐', 즉 '중화루 간짜장'이라는 음식은 어떤 이유에서 '중깐'이라는 별칭까지 얻고 목포를 대표하는 음식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걸까?"라는 것이었다. '간짜장이 한 도시를 대표하는 음식이 된다고?'라는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선 중화루의 역사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중화루는 1947년 목포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초대 사장님은 1947년부터 1950년까지 3년간 운영을 하다 조카였던 2대 왕서은 사장님께 가게의 운영을 넘긴다. 당시의 상호는 '중화식당'. 전성기 때는 10명이 넘는 직원을 둘 정도로 번성했었다. '중깐'을 만들어 냈던 것도 2대 사장님이 운영하던 시절이다. 보통 중국 음식점에서는 식사와 요리를 함께 할 경우 요리부터 우선 내준다. 요리를 먼저 맛보며 술을 곁들인 후, 식사를 하는 것이 보통의 순서.(이런 방식은 중국도 동일하다.) 하지만 두세 가지의 요리를 먹고 난 후엔 배가 불러 식사를 남기는 것이 흔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2대 사장님께서 면의 굵기를 조절하고 짜장면에 올라가는 재료를 잘게 다져 '후식(디저트)'의 형식으로 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이 요즘 우리가 말하는 '중깐(중화식당 간짜장)'의 시작이었다. 한때는 단골들만 찾았던 메뉴였는데 2000년 중반부터 당당하게 메뉴판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짜장면이 기록으로 우리 음식계에 처음 등장한 것이 1930~40년대. 이런 짜장면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한 세대 정도의 시간이 흐른 1970년대 정도부터이다. 또 한편으로는 짜장면이라는 음식에서 다양한 형태의 짜장면들이 파생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일반 짜장면부터 시작하여, 간짜장, 삼선짜장, 유니짜장, 사천짜장, 백짜장 등 화려한 짜장면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중깐도 이러한 흐름에 편승했다. 


목포의 오래된 도심을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다 중화루에 다다랐다. 

점심시간을 약간 넘긴 시간. 때마침 휴일이라 매장은 가득 차 있었고 몇 팀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가만히 그들의 뒤로 서 있다가 순서대로 입장을 했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고 주문을 했다. 사실 중화루를 찾은 모든 이들이 '중깐'을 먹고 있었기에 메뉴판을 보는 행위는 사실 요식적인 행위에 가까웠다. 

'중깐 하나랑 탕수육 작은 것 하나, 그리고 이과두주 하나만 주세요'

고개를 들어 매장을 돌아보니 역시 혼자 찾은 손님은 초빼이가 유일했다. 사실 20대부터 혼자 먹는 것에 익숙했던 술과 밥은 이젠 더 이상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될 경지에 다다랐다. 오히려 때로는 의미 없는 관계 유지를 위한 억지 술자리나 식사자리를 피해 조용히 혼자만의 식사시간을 가지는 것이 더 편하기도 했다. 때로는 음식과 식당에 집중하고 때로는 술 한잔 곁들이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도 되었기에 혼자만의 식사가 그렇게 의미 없지는 않았던 듯하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고 음식에 포커스를 맞출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오히려 더 즐기기도 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작은 테이블 위로 중깐과 탕수육 접시가 오르고, 단무지와 양파 그리고 김치 한 접시가 올랐다. 중국집의 식기 중 가장 좋아하는, 이과두주 잔과 함께 아기자기한 이과두주 병도 그 옆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꽤 비싼 녀석부터 3천 원짜리까지 다양한 이과두주를 마셔봤지만 초빼이의 취향엔 역시 가장 저렴한 이과두주가 딱 들어맞는다. 작지만 단단한 촉감의 이과두주 잔을 엄지와 검지로 들어 한 잔 털어 넣는다. 싸구려 이과두주는 절대로 입안에 머금고 있으면 안 된다. 식도로 술을 던지듯 털어 넣어야 한다. 한 잔의 이과두주가 세상과 입술의 경계를 지나자마자, 날것 그대로의 알코올 향을 피워 올리며 꽤 잘 벼린 칼로 식도를 천천히 긁고 지나가는 느낌이다. 사실 이 생생한 고통을 느끼기 위해 싸구려 이과두주를 찾는다.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그런 술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춘장을 찍은 양파 한 조각으로 마무리. 이 묘한 향과 맛, 그리고 고통이 적절히 믹스된 아이러니한 순간을 즐기는 편이다. 중국 음식점에서 이과두주를 주문하면 꼭 첫 잔은 이렇게 마신다.    


'중깐'은 사실 모양새로만 보면 '유니짜장'에 가깝다. 잘게 다진 고기와 채소를 춘장과 함께 볶아 면 위에 올렸다. 그렇다고 단순히 유니짜장으로 보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얇은 면포를 보는 듯한 가늘고 얇은 면이다. 짜장과 같은 깊고 두터운 맛의 소스에 어울리는 면은 보통 굵은 면들인데, 중깐의 면은 '심각하게' 가늘고 얇다. 이런 경우 면의 식감과 존재감을 느끼기 쉽지 않다. 진한 소스와 양념의 맛에 면의 식감이 파묻혀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릇째 들고 젓가락이나 숟가락으로 입에 퍼 넣듯이 먹었을 수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 끼 식사로 먹는 음식이 아니라 이미 포만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에서 먹는 후식과 같은 음식으로 기능을 하도록 설계되었다. 깔끔한 맛으로 입을 개운하게 하는 기능보다는 부담감을 덜 느끼게 하여 한 끼 식사를 했다는 만족감을 주는 것에 더 치중한 느낌이다. 


젓가락 포장을 벗겨 면을 비빈다. 사실 아직도 이 플라스틱 젓가락이나 쇠 젓가락의 인공적이고 미끄러운 촉감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예전처럼 나무젓가락(예전엔 와레바시라 불렀다. 와리바시의 잘못된 발음이다. わりばし, 割(り)箸)을 내줬으면 하는 푸념을 자주 한다. 나무젓가락의 부드러운 표면이 면을 도망가지 않게 잡아주는 그런 '안정감'을 선호하는 편이다. 이런 면을 보면 초빼이도 아재 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중깐은 정말 상상한 대로 입 안에 넣자마자 스르르 녹아버리는 느낌이다. 치아를 사용하지 않고 혓바닥과 입천장으로만 저작질을 해도 충분히 소화가 가능할 정도로 면은 부드럽다. 오히려 소스의 맛이 더 강하게 입안을 지배한다. 그 소스의 맛에 함몰되다 보면 면의 질감을 놓칠 때가 많았다. 2대 사장님의 의도가 이런 것이리라. 부담감 없게, 그러나 한 끼 식사는 한 것과 같은 느낌.  

'중깐' 그릇을 마시듯 비워버리고 다음 목적지인 탕수육으로 젓가락의 방향을 돌렸다. 한 김 식은 탕수육 한 조각을 소스 없이 입에 넣었다. 주방장의 손을 떠나 테이블에 오른 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지만 눅눅하지 않다. 정말 잘 튀긴 고기튀김이다. 탕수육 한 조각에서 오래된 노포의 수준 높은 조리 기술을 느낀다. 초빼이는 원래 탕수육을 먹을 땐 음식의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 소스를 부어먹는데 이날은 탕수육의 기름진 맛을 좀 더 느끼기 위해 한시적인 '찍먹파'로 전향했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기름의 향과 맛이 꽤 좋다. 묵은 기름을 쓰는 집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신선한 기름의 존재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탕수육의 기름기가 입 안을 덮고 있을 때 그것을 말끔히 씻어주는 이과두주의 향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우리가 중국 음식점을 찾으면 가장 많이 찾고, 가장 흔한 음식인 짜장면과 탕수육이지만 음식 하나하나에서 노포의 위엄과 기품을 느낄 수 있었다. 위엄과 기품이라는 것이 규모가 크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를 갖춘 식당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비록 허름하고 소박한 외형이지만 음식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하고 철저하게 관리해 온 그런 곳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 위에 오랜 시간 동안 운영해 온 노포의 품격까지 더해졌으니 어떤 말을 더 붙일 수 있을까? 


꽤 만족스러운 점심식사 겸 반주 자리였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천천히 이과두주 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더 좋았겠지만, 문 밖으로 보이는 대기자들의 움직임이 너무 확연하게 보여(초빼이의 자리가 바로 문 앞이었다) 여유를 가지지 못했던 것. 그렇다고 무작정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으니 가급적 빨리 음식과 술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마누라님께 항상 한소리 듣는 아재가 눈치까지 없으면 세상 사는 일이 꽤 고단하지 않겠는가?

 [메뉴추천]

1. 1인 이상 방문 시 : 중깐 + 탕수육(소) + 이과두주

2. 2인 이상 방문 시 : 중깐 + 탕수육(대) 또는 요리류 + 이과두주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별도의 주차장은 없다. 인근 공영 주차장 이.

2. 화~일 11:00~19:00 / 월요일 정기휴일 / 브레이크타임 15:00~16:30 / 라스트 오더 18:30  

3. 참고

    - 아침 오픈런이 아니라면 기본적인 웨이팅은 각오해야 한다.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태동반점(중깐), 만선식당, 영암식당, 덕인홍어집, 섬마을식당, 한일포차, 옥암식당, 유달

      콩물, 동궁가물치, 궁전생고기, 독천식당, 장터식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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