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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의 첫 끼. 부산차이나타운의 백년 노포, 평산옥

170. 부산시 동구 초량동 평산옥

by 초빼이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었다.

송곳처럼 햇빛이 살갗을 찌르며 내리쬐는 여름이 시작되었다. 요즘은 한 여름에 휴가를 몰아서 가는 사람들을 많이 찾아볼 수 없지만, 적어도 IMF 이전에는 '휴가철 또는 여름휴가'라는 단어가 우리의 삶에서 낯설지는 않았다. 매년 7월 말에서 8월 초까지는 전국 공통의 휴가철이었다. 모든 산업군의 노동자들이 이 기간에 여름휴가를 떠났기에 고속도로는 명절 귀성길처럼 막혔다. 게다가 고속도로도 지금처럼 넉넉지 않았다. 초빼이의 옛 기억에도 강북에서 한남대교를 건너 경부고속도로에 접어드는데만 두 시간이 걸렸던 기억도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름'은 '부산'이었다.

제주도는 항공료와 숙박비가 비쌌기에 부자들이 찾던 곳이었다. 동해안은 그 경관에 비해 너무나 시설이 열악했고 관광을 위한 인프라가 너무 약했었다. 그에 반해 '해운대'가 있고 '광안리'가 있던 부산은 모든 것이 갖춰졌던 곳이었다. 여름이면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해운대와 광안리 바닷가는 연일 전국의 피서객 몇 백만 명이 모여들었다는 소식이 9시 뉴스데스크의 오프닝을 장식할 정도였으니 오히려 부산으로 휴가를 가지 않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적어도 90년대까지는 부산은 '여름'이나 '여름휴가'라는 단어와 같은 뜻을 공유하던 단어였다.


얼마 전 일정이 있어 부산을 찾았다. 오랜 시간의 운전이 점점 버거워 과감히 차를 버리고 오랜만에 KTX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하루의 강의와 이틀간의 노포 취재를 목적으로 찾은 부산 일정은 꽤 촘촘하게 짜여 있었다. 경주를 거쳐 울산을 지나 부산역에 도착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던 무렵, 끈적끈적한 여름비가 부산의 모든 것을 적시고 있었다. 부산의 하늘도, 부산의 바다도 모두 장마라는 끈적한 늪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허기가 올라왔다. 인천 송도에서 새벽같이 나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야 했으니 물 한 모금 마신 것이 다였다. 부산역에 내리자마자 인근의 노포를 찾을 요량이었기에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준비하고 싶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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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적거리며 내리는 비는 꽤나 끈덕졌다. 어지간하면 그칠 만도 한데 꽤나 질척거리며 따라왔다. 플랫폼 밖으로 나와 한 손으론 캐리어를 끌고 다른 손으론 큰 우산을 받쳐 들었다. 샤워기로 흩뿌리듯 장맛비가 우산 밖의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부산역 앞 대로를 건너 뒤편으로 접어들었다. 눈에 익은 차이나타운의 입구가 오랜만에 부산을 찾은 나를 반겼다. '신발원'과 같은 유명한 업장들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과감히 그들을 지나쳐 부산 차이나타운의 안쪽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3억이 넘게 들었다는 중국풍의 동사무소(행정복지센터) 건물에 한숨 한 번 쉬고 다시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았다. 몇 걸음만에 부산을 대표하는 노포 평산옥에 다다랐다. 초량동의 터줏대감 같은 100년 노포 평산옥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 사람의 피를 잇지는 않았지만, 초빼이는 '초량(草梁)'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배와 가슴사이 어느 곳에서 아른거리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어릴 적 초량동에서 술 한번 마신적도 없고, 초량에 옛 애인이 살았던 것도 아닌데 참 희한한 일이다. 이런 느낌을 받을 때마다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리려 애쓰지만 그리 쉽지 않다. '초량'이라는 명칭은 뭔가 연약하고 보호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연민을 일으킨다. 아무 관계도 없지만 보기만 해도 애잔한 마음이 드는 그런 느낌이랄까?


초량은 '풀 초(草)'자와' 뒬 량(梁)'이라는 한자로 '억새나 갈대'라는 의미다. 아주 오래전에는 부산 앞바다의 억새가 무성한 지역이었던 모양이다. 원래 초량(구 초량)은 부평동과 부민동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개항한 1876년 이후 현재의 초량동이 '신초량'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제는 초량이라는 지명은 이곳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굳어져 버렸다. 개항 이후 초량은 부산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본인 거주지였던 '왜관'과 청나라 영사관이 설치되며 '청관 거리'가 들어섰다. 지금 부산역 건너편의 차이나타운은 이 시기부터 형성된 것이다. 1901년에는 경부선 철도의 개통 및 초량 구포 구간의 철도 개통으로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고, 1953년 부산역 대화재가 발생한 후 현재의 위치에 부산역이 들어서며 다시 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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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에서부터 시작하는 초량동의 근대화와 발전은 흡사 인천의 차이나타운과 동인천역 일대의 이력을 보는 것이 아닐까 착각하기도 했다. 군산이나 목포 같은 우리나라 개항장의 역사는 큰 틀에서, 초량이나 인천 차이나타운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지역의 부흥과 쇠락도 마치 '새옹지마(塞翁之馬)'와 같이 찾아들었다. 영광과 쇠락은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붙어 다녔다. 쇠락과 부흥은 단지 그 순서의 차이만 있었다. 지금의 초량은 그 전성기를 활활 불태우고 이젠 조금씩 쇠락해 가는 구도심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인천의 동인천 인근과 차이나타운을 찾을 때마다 드는 연민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골목길을 조금 둘러보니 왜 사람들이 부산을 "노인과 바다"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노인과 바다"라는 자조 속에, 부산 사람들의 옛 영화에 대한 상실감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평산옥의 문을 열었다. 일견 동네의 조그만 국숫집과 다를 바 없는 외형에 기대가 조금 꺾였다. 노포로서 독특한 아이덴티티나 특징적인 상징물 등을 바랐지만 그런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길을 걷다 고개를 돌리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국숫집 같아 보였다.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홀 자리는 오래된 노포치고는 굉장히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어서 오이소. 아무 데나 앉으이소"

직원분의 말에 '찐한' 부산 사투리가 배어 있다. 서울 사람들은 경남과 경북의 사투리를 구분하지 못하지만, 경남과 경북 사람들은 서로의 "말이 이상하다며" 명확히 구분을 한다. 게다가 경남에서도 동부 경남인 부산과 마산, 그리고 서부권인 진주는 사용하는 몇몇 단어와 억양에서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차이가 있어 출신 지역을 쉽게 구분하기도 한다. 직원분의 말 한마디에서 '찐 부산'에 다다랐음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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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판이 굉장히 투박하다. 여느 집들의 메뉴판처럼 화려한 디자인으로 음식을 알리려 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딱 이거만 한다. 머 물래?(뭐 먹을래)"라고 무심하게 묻는 '경상도 아지매' 같다. 메뉴는 단 3가지. 수육과 국수와 열무국수가 전부다. 간단해서 메뉴를 정하기에 어려움은 없지만 메뉴의 구성은 참 개연성이 없다. 돼지 수육과 국수라니. 참 뜬금없다. 돼지국밥도 아니고 돼지 육수에 말아 놓은 국수는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 너무나 가볍다고 할까? 뜬금없음은 차이나타운에서 우리의 오래된 음식인 수육과 국수를 파는 것부터 시작되었으니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그 뜬금없음보다 우리가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음식의 가격이었다. '수육 1만 원, 국수 3천 원, 열무국수 4천 원.' 아이러니하게도 손님인 내가 '도대체 이렇게 음식값을 싸게 받아서 어디서 남기시려나?' 하며 수입을 걱정하는 오지랖을 부려야 할 정도의 가격이다. '밥 한 끼에 1만 원이 넘는 이 시대에 살면서 도대체 이런 가격이 말이나 되나?'라는 걱정이 앞선다.


부산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맞이하는 첫 음식이니 조금 거하게 주문하고 싶었다. 장맛비와 여름 열기에 가뜩이나 주눅 든 내 몸과 마음을 위해 수육과 열무국수를 주문했다. 그리고 열흘 전 '대선'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대선'소주도 한 병(부산을 찾았던 시간은 지난 6월 14일경이었다). 2시간 40여분의 고된 여정을 달래기에 이만큼 적절한 선택이 더 있을까?


수육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가게와 함께 세월을 짊어졌던, 낡은 '오봉'에 다른 찬들과 함께 올려 테이블 위에 그대로 놓고 가신다. 무채와 김치, 부추김치, 마늘과 고추, 쌈장, 새우젓과 수육용 소스로 구성된 한 세트다. 단출하다면 단출할 수 있는 한 상이다. 딱 필요한 것들만으로 채워져 있다. 너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차림이다. 욕심부리지 않고 순리대로 살아온 100년 노포의 상차림으로 이보다 적절할 수는 없을 것 같다. 100년을 살아오며 깨우친 철학이 저 낡은 쟁반에 담겨있다. 마치 "이렇게 인생을 살아보렴"하고 초빼이에게 한마디 내 건네는 것 같다.

하얀 에나멜 접시에 담은 1만 원짜리 돼지고기 수육은 가격에 비해 꽤 양이 많다. 잡내는 사실 걱정하지 않았다. 백 년 노포인데 기본을 못할까? 쓸데없는 의심보다는 '이 한 접시를 어떻게 해야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는데 집중했다. 수육 한 점 한 점마다 잘 삶은 돼지고기의 살결이 옛 전사들의 문신처럼 선명했다. 돼지고기를 미리 삶아 한소끔 식힌 후 커다란 나무 도마 위에서 잘라낸다. 평산옥의 수육은 꽤 얇다. 마치 일본 라멘에 고명으로 올리는 챠슈나 초빼이가 즐기는 대패 삼겹살과 비슷한 두께다. 이런 두께를 유지하기 위해선 반드시 고기를 식힌 후 썰어야 한다. 뜨거운 상태에서 썰려하다간 고기 자체가 바스러지기 일쑤다.


소주잔에 '대선'을 채우고 젓가락을 들어 수육을 집었다. 예상보다 더 찰랑거리는 수육 한 점이 마음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킨다. 돼지껍질까지 붙어 있어 그 탱탱함은 더욱 배가 되었다. 젓가락을 통해 초빼이의 손까지 그 생생함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수육 한 점을 그대로 입에 넣었다. 잘 삶은 수육의 향이 좋다. 입안에서 살짝 걸리적거리는 돼지 껍데기가 마치 '나를 잊지 말라'는 듯 소리 없이 아우성친다. 부드러운 고기와 꼬들거리는 껍질의 조화가 좋다. 소주잔이 어느새 비어 있다. '도대체 누가 내 술을 훔쳐 먹는 거지?'라며 신경을 곤두세운다. 고추 한 조각을 쌈장에 찍어 수육과 함께 들었다. 여름 고추라 꽤나 매섭다. 입안이 얼얼해지며 온몸의 땀구멍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열리기 시작했다. 새우젓과의 조합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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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의 수육이 유명해지는데 한 손 거든 것은 수육 전용 소스다. 새콤달콤한 소스가 수육의 맛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고 한다. 하지만 초빼이의 입에는 조금 달았다. 달콤한 소스와 수육의 조화도 나쁘진 않지만 초빼이의 입에는 쌈장(막장)이 더 잘 어울렸다. 소스 선택 취향도 점점 아재가 되고 있다. 허기가 져 이 집을 찾았는데 허기를 면하는 속도보다 소주에 취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수육으로 향하는 젓가락의 움직임이 내 것이라 느끼지 못할 만큼 빨라졌다. 정신없이 수육을 탐닉하고 있자니 직원분이 슬쩍 열무국수 그릇을 테이블에 올려놓으신다.


열무국수를 담은 그릇이 허를 찔렀다. 사장님도 아시는 걸까? '남자는 핑크'라는 범인류적 공통 정서를?

열무를 얼마나 담았던지 아랫단의 국수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조금은 웃자란 듯 넓은 이파리의 열무가 국수 그릇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다.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은 후 국물을 들이켰다. 뻘겋게 열무김치가 녹아든 국물은 차가운 육수와 섞여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4천 원짜리 국수의 위용이 상상이상이다. 이러면 되었다. 수육 한 점을 집어 국수가락과 함께 입으로 넣는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봄과 여름을 사이를 가득 채우며 만들어 낸 대지의 산물을 이 한 젓가락으로 집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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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만 내는 평산옥의 열무국수는 그야말로 계절의 축복이다. '평산옥은 여름에 와야 하는구나!'라는 깊은 깨달음이 가슴을 스친다. '여름의 도시' 부산을 찾으면 평산옥을 가장 먼저 들려야 하는 이유를 드디어 찾아냈다. 부산의 관문 '부산역'에서 5분만 걸으면 되니 부산에서의 첫 끼니로 이보다 더 적절한 '부산의 음식'은 없다. 부산의 제대로 된 음식을 조금 더 느껴보고자 찾은 이번 부산행의 첫 식사다.


앞으로 남은 일정이 더 기대된다.


[음식, 음주, 노포 전문 크리에이터 초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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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 추천]

1. 1인 이상 방문 시 : 수육 1인분 + 국수 또는 열무국수 + 소주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별도의 주차장은 없다. 가게 앞 빈자리에 주차를 하거나 차이나타운 공영 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2. 월~토 10:00~20:00 / 일요일 정기휴무

3. 참고

- 가격이 저렴한 만큼 1인 1 메뉴의 원칙은 지켜야 한다.

- 여름 한정의 열무국수는 부산의 또 다른 맛이다. 수육의 맛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초량불백, 부산할매돼지국밥집, 본전돼지국밥, 사해방, 마가만두, 신발원, 일품향, 88수육

돼지국밥, 명성횟집, 석기시대, 중앙모밀, 양산박, 뚱보집, 중앙식당, 서울깍두기, 원조 고갈비, 할매집

회국수, 백광상회, 수복센터, 종각집, 삼송초밥, 18번완당집, 부산명물횟집, 고등어정식할매집, 여송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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