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서울 은평구 구산동 코스모스 분식
가끔은 제대로 된 식사보다 분식류가 무척 땡기는 날이 있다.
처량하게 비가 내리는 날이나, 일상의 식사가 너무나 지겨워 뭔가 새로운 변화를 필요로 하는 날, 전날의 과음으로 뭔가 자극적이고 매콤한 국물이 땡기는 날,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막걸리가 마시고 싶은 그런 날도 갖가지 분식 메뉴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각종 반찬과 국,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흰쌀밥의 일상도 좋지만 조금은 간단하고 조금은 불량스럽기도 한(?) 분식은 그런 일상의 변덕스러운 식욕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되기도 한다.
수십 년 전부터 서울에서 떡볶이를 이야기할 땐, 신당동의 즉석 떡볶이 집들을 빼놓을 수 없었다. 지금은 조금 시들해졌지만 충무아트홀 건너편 신당동 소방서가 있던 골목에는 꽤 많은 즉석 떡볶이 집들이 성황을 이뤘었다. 떡볶이 골목의 전성기 때는 40여 개 이상의 떡볶이 집이 영업을 했었다지만 지금은 체 10여 곳도 되지 않는다. 떡볶이 골목도 세월의 부침을 겪고 있는 중이다.
떡볶이는 원래 궁중의 음식이었다. 규곤요람(閨壼要覽)이라는 19세기 조리서에는 '병적법(餠炙法)'이라는 떡볶이 조리법이 소개되어 있고, '餠炙(병적)'이라는 음식명의 기원을 따라가면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가진 음식이기도 하다. 떡볶이의 원형은 떡과 고기를 간장으로 볶은 음식이었다. 고추가 조선으로 유입되고 고춧가루와 고추장이 만들어지며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신당동의 떡볶이의 역사는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인 1953년 '마복림' 할머니가 고추장과 춘장을 혼합한 양념에 떡과 야채를 넣고 볶아 팔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떡볶이는 초빼이와 그 윗 세대에게는 추억의 음식이다.
'초등학교'보다는 '국민학교'를 다니던 세대들에겐 더 각별한 기억이기도 하다. 50원이나 100원짜리 동전 하나면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풍족하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학교 등굣길에도 떡볶이를 사 먹었던 기억이 있었고,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학교 수업 중 몰래 학교에서 빠져나와 친한 친구들과 떡볶이 집으로 찾아가 마수걸이 손님이 되었던 적도 몇 번 있다.
그 시절의 떡볶이는 주인이 조리를 모두 끝낸 후 그릇이나 접시에 덜어 나눠주던 음식이었다. 때로는 좌판의 할머니나 리어카의 아저씨가 떡볶이 집의 주인이 되기도 했다. 어떤 집에서 하든 맛만 있으면 상관없었다. 때로는 다른 동네의 친구들이 소개해 준 떡볶이집을 찾아가기도 했고, 초빼이가 다니던 국민학교에서 한참 걸어 여상(女商, 여자상업고등학교) 앞의 떡볶이 집까지 원정도 감행했었다. 혼분식 장려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밀가루의 소비를 강제했던 시기를 맞으며 분식집은 더욱 늘어갔다. 바로 그즈음, 즉석 떡볶이가 세상에 나왔다. 1970년대 말 즈음이었다.
떡볶이 집 할머니나 아줌마가 독차지하던 버너는 프로판 가스의 대중화 붐을 타며 손님들의 상 위로 올라왔다. 철판 위에서 주인이 만들어 접시에 담아주던 떡볶이는 손님들이 직접 조리해 먹는 음식으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맞춰 마복림 할머니의 즉석 떡볶이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였고, 신당동 일대는 즉석 떡볶이의 메카가 되기 시작했다. 80년대에는 즉석 떡볶이 집에 'DJ 박스'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없던 그 시절의 청소년들에게 신당동 떡볶이 집은 합법적인 음악다방이자 음악감상실이 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문화공간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음식적인 면에서도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원래는 가래떡과 채소만으로 만들어졌던 떡볶이에 다양한 재료들이 첨가되기 시작했다. 밀가루가 가득한 싸구려 오뎅(어묵이라는 단어보다는 오뎅이 더 잘 어울린다)이 즉석 떡볶이에 더해졌고 라면이나 쫄면 등의 사리도 추가되었다. 떡볶이 양념에 대한 다양한 시도도 이 무렵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즉석 떡볶이의 인기는 당시 가장 인기 있던 가게의 마복림 할머니가 고추장 광고에 출연하며 정점을 찍었다.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라는 카피와 함께 신당동 즉석 떡볶이는 전 국민이 모두 아는 음식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는 '흥함이 있으면 기울어짐도 있는 법.'
신당동 즉석 떡볶이 골목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외식업의 비약적 성장으로 다양한 먹거리와 간식들이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패스트푸드로 알려진 햄버거 프랜차이즈들이 순식간에 청소년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했고, 피자 프랜차이즈와 패밀리 레스토랑의 유혹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신당동을 찾기 시작하던 사람들의 발걸음도 조금씩 뜸해지기 시작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신당동 떡볶이집들에서 술도 팔기 시작했다.
오래된 가게들은 후대로 내려가면서 작은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원조 사장님의 손에서 다음 대(代)로 조금씩 음식의 맛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손님을 위한 서비스도 줄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떡볶이와 함께 제공되던 단무지마저 변하기 시작했다. 맛도 양도 예전 같지 않았다. 가족들의 사업으로 변하기 시작하며 무언가 빈 곳이 생기기 시작했다. 고객의 입맛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그 변화들을 따라잡지도 못했다. 초빼이도 추억에 잠겨 마눌님과 함께 찾았다가 아쉬운 마음만 안고 발걸음을 돌렸다.
얼마 전 서울시의 노포 관련 심의위원으로 참가할 기회가 생겨 몇몇 노포의 자료를 볼 기회가 있었다. 노포들의 리스트에서 뜻밖의 가게를 보게 되었다.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아닌 은평구 구산동의 오래된 떡볶이 집이었다. 1981년부터 영업을 시작하여 올해까지 무려 44년간 한자리를 지키며 즉석 떡볶이를 요리해 온 집이었다. 이름도 전혀 떡볶이 집 같지 않은 '코스모스 분식'. 무언가 진한 추억의 향이 느껴졌다.
내가 사는 서해안 낙도에서 은평구 구산동으로 찾아가는 길은 꽤 먼 길이다. 낮 시간 동안 한 시간에 두 대만 배정된 광역버스를 시간에 맞춰 타야 하고, 서울까지 들어가는 시간도 무려 2시간이나 걸린다. 합정에서 버스를 내려 다시 지하철로 갈아타 낯선 동네로 향했다. '코스모스 분식'이라는 이름만 보고 그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다. 음식의 맛보다 가게의 이름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 분식집 이름이 '코스모스'라니 너무 정겹지 않은가? 구산역에서 걸어 나와 금세 가게에 도착했다.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인근 여고의 학생들이 떡볶이를 즐기고 있었다. 학교의 체육복인득 편한 옷을 입고 떡볶이를 즐기는 모습을 보니 30년 전 학교 앞 중국집에서 저녁 자율학습 전 친구들과 저녁 도시락에 중국음식을 주문해서 먹던 일도 떠 올랐다. 문을 열고 코스모스의 꽃잎들을 활짝 열어젖혔다. 달콤한 떡볶이의 향기가 꽃향기처럼 코를 간질 었다. 조금은 마른 체형의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자리를 잡는 것에서 주문까지 거침이 없었다. 점심과 저녁 사이 애매한 시간이라 번잡함도 없었다. 즉석 떡볶이 1인분에 다양한 토핑과 사리를 얹었다. 쫄면 사리와 야끼만두, 계란을 추가했고 즉석 떡볶이의 영원한 동반자 김말이 튀김도 추가로 올렸다.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곳에선 팔지 않는 메뉴라 포기했다.
단출한 한 상이 금세 준비되었다. 즉석 떡볶이 냄비 하나와 단무지 접시, 그리고 앞접시 하나가 전부인 한 상이다. 단출하기에 진솔하고 꾸밈이 없다. 현란한 무엇인가로 정신을 쏙 빼놓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단출함을 든든한 옛날식 가스버너가 묵묵히 받쳐준다. 테이블마다 하나씩 올라있는 옛날식 가스버너는 이 집이 버텨온 시간들을 보여주는 단편이다. 조금은 불편할 것이 분명할 것인데도 간편한 휴대용 부탄가스버너 대신 아직도 옛날식 가스버너를 고집하는 모습이 꽤 감동적이다. 부탄가스버너가 쫓을 수 없는 그 나름의 맛이 있다. 시간을 거슬러 2~30년 전으로 회귀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 예스러운 느낌에 무게를 더하는 또 하나의 사물은 지금은 찾기도 힘든, 검은색 법랑냄비다. 법랑냄비를 버너에 올리고 각종 채소와 오뎅, 떡을 올려 바글바글 끓여 먹는 그 즉석 떡볶이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유혹 중 하나다. 맑은 육수가 끓어오르며 오뎅 속에 숨어있는 양념장을 아이스크림처럼 녹이기 시작한다. 보글거리는 거품 하나하나에 진한 양념장 덩어리가 무장 해제되는 것은 순식간. 눈 몇 번만 깜빡이면 어느새 떡볶이 국물은 벌겋게 달아오른다. 육수가 바글거리는 법랑 냄비 속 오뎅과 떡은 그제야 잔뜩 굳어있던 몸에 힘을 빼기 시작하며 끓어오르는 거품에 박자를 맞춘다. 벌겋게 달아오른 육수에 진심으로 순응한다는 의미. 사람이든 떡볶이든 모쪼록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얇은 오뎅 조각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육수에 팔랑거리기 시작하는 그때가 즉석 떡볶이에 젓가락을 대기 딱 좋은 시간이다. 오직 촉으로만 느껴야 알 수 있는 시간. 젓가락과 요리 수저를 들어 첫 번째 즉석 떡볶이를 맞이한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앞 접시에 옮겨 담는다. 기본에 충실하기 위해 고추장 맛을 선택했다. '마복림 할머니' 류의 짜장소스와 고추장이 혼합된 소스는 부러 피했다. 처음엔 오뎅이나 채소 같은 얇은 재료를 먼저 고른다. 두께가 얇기에 매운맛이 빠르게 스며들 수 있다. 그다음은 떡이나 쫄면 등의 사리가 좋다. 거기에 추가한 튀김류의 토핑도 같이 먹어야 한다. 조금만 더 놔두었다간 튀김옷마저 떡볶이 국물에 녹아버린다.
끓어오르는 육수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은은하게 올라오는 단맛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양파와 당근, 파 등의 채소가 뿜어내는 진액들이 채수에 녹아들며 떡볶이의 품격을 올린다. 거리에서 파는 스트리트 푸드를 넘어선 하나의 요리가 된다.
그러고 보니 '즉석 떡볶이'는 '타이밍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의 음식'이다.
먹는 이는 재료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그 재료가 익어가는 시간에 따라 음식을 먹어야 한다. 만드는 이도 시간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떡은 어느 정도로 익혀야 하는지, 언제 퍼지기 시작하는지도 알아야 하고, 오뎅도 특성도 알아야 한다. 떡볶이의 재료들이 육수를 머금기 시작할 즈음 언제가 가장 맛있는 시간인지도 알아야 한다. 거기에 조리 전 냄비에는 어떤 순으로 놓아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세상에 어떤 음식이 어렵지 않을까만은, 몇 십 년간 떡볶이를 먹어 온 나도, 이제야 떡볶이라는 음식의 본질적인 특성을 깨닫는다. 아직, 멀었다.
초빼이가 한참 젊었던 시절, 신당동 떡볶이 집을 처음 찾았을 때의 흥분과 설렘을 이 집에서 다시 느꼈다. 지금은 신당동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그때의 맛을 이 집은 여전히 만들어 낸다. 전북 익산에서 상경한 사장님 부부는 신당동 즉석 떡볶이가 인기를 끌기 시작할 무렵 이곳 구산동에 즉석 떡볶이 집을 열었다. 짜장맛 소스와 혼합맛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면 한참 전성기로 접어들던 신당동의 그것을 벤치마킹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전형적인 '후발주자의 전략'이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달랐다. 신당동의 그것이 후대로 전승되고 가족들의 손으로 표준화되고 대량 생산이 가능한 공장의 제품으로 바뀌는 동안, 이 집은 일일이 물건을 떼오고, 손으로 만드는 옛 방식을 그대로 고수했다. 아직도 초대 사장님의 손으로 음식을 만들고 손님들에게 낸다. 수십 년을 쓴 가스버너에 자그만 얼룩 하나 남기지 않는 사장님의 꾸준함과 근면함이 1등을 위협하는 2등을 만들어 냈다. 단지 오래 버텼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엔 붙여야 할 부연이 너무 많다.
냄비 바닥까지 싹 비운 후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정읍에서 서울로 상경한 스토리부터 초빼이가 앉은자리 바로 옆의 냉장고와 김치냉장고가 있던 자리는 옛날 DJ박스가 있던 자리였다는 회상도 해 주셨다. 그리고 그 DJ박스엔 지금도 유명한 가수 김장훈 씨가 젊은 시절 한동안 DJ로 일했다는 일화도 알려주셨다. 2천 년대에 들어서는 한참 유명했던 '궁'이라는 드라마의 촬영장소로 쓰였던 일도 있었다. 이제는 김치 냉장고가 DJ박스보다 더 어울리는 가게가 되었지만, 학생들로 꽉 찬 이곳에서 한껏 멋을 부린 DJ가 외국의 POP 음악을 틀어주던 모습도 상상하게 된다. 지금은 스마트 폰과 헤드폰으로 모든 음악을 다운로드하거나 스트리밍 하지만, 인터넷이 없던 시절 DJ들을 찾아다니고 MBC의 '두 시의 데이트'나 '별밤'이 음악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던 시대의 이야기이자 흔적이다.
별밤을 듣고 두 시의 데이트를 듣던 시절의 감수성이 사장님의 주름 사이에 깊이 자리 잡고 조금씩 얼굴을 비춘다. 그 시절의 감성이 떡볶이의 은은한 단맛처럼 법랑냄비 위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장님에게선 지나간 시절을 붙잡고 싶다는, 부질없는 열망은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흘렀고, 좋은 시절을 보냈고, 나도 이젠 늙었으니 힘이 될 때까지 영업하고 다음 세대로 넘기고 싶다'는 한 문장에 지난 40년간의 이야기를 모두 녹여냈다. (나를 포함한) 어지간한 작가들의 솜씨보다 더 좋은 문장을 만들어 내셨다.
"아이고 그래도 건강 잘 살피시고 오래 운영하시면 좋겠어요"라고 설레발치니 살며시 미소 지으시며 카운터로 걸음을 뗀다.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새 몇 테이블이 더 채워졌다. 학생들 한 무더기가 들어왔고, 이 동네에서 사는 듯한 젊은 부부가 서너 살 먹은 아이를 데리고 그 뒤를 이었다. 식재료를 납품하는 아저씨가 잠깐 들러 내일 납품할 물건과 수량을 확인하고 나갔고, 내 나이 또래의 아주머니 두 분도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특이한 것은 이들 모두 따로 메뉴판을 보지 않고 자리에 앉자마자 주문을 했다. 단골들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사장님 오랜만에 정말 맛있는 떡볶이 먹었습니다. 건강하세요. 다시 또 들릴게요"라고 인사드리며 문을 열었다. 카운터 옆 덕지덕지 붙은 거래처의 스티커들이 더욱 소중해 보였다. 문을 열고 바깥의 공기를 들이 마시니 이제야 현실로 돌아왔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마치 두 개의 달이 뜨는 '1Q84'의 세상에 머무르다 다시 내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무척이나 신비하고, 기분 좋은 하루다.
[음식, 음주, 노포 전문 크리에이터 초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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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 추천]
1. 1인 이상 방문 시 : 즉석 떡볶이(짜장맛, 고추장맛, 혼합) + 토핑류 + 음료(술을 팔지 않음)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별도의 주차장은 없다. 인근 공영주차장 이용. 구산역 입구와 가까워 접근이 용이하다.
2. 월~일 10:00~20:00 / 라스트 오더 19:30
3. 참고
- 1인분의 가격은 8천 원, 2인분은 1만 원, 3인분은 1.2만 원이다. 조금 이상한 듯 하지만 나름 합리적인 가격
체계라는 느낌.
- 어떤 사리와 토핑을 올리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 소주를 팔지 않는 것이 아쉽고, 아쉬우며, 또 아쉽다.
4. 여행 및 관광 정보
- 인근노포 : 싸리골, 곰돌이 포차, 만포면옥 본점, 연천갈비, 목노집, 원조불오징어(두꺼비집), 개풍반점, 여수
집, 불타는소금구이, 청일집, 둥지, 김용해의소문난순대국집, 옥이네 김밥, 보들이족발, 삼오순대국, 서부
감자국, 대림 감자국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