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추억을 오가는 순두부와 비지의 맛, 원조초당순두부
조금씩 바람이 무거워지는, 초가을을 지난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기, 지속되는 연극 연습으로 잔뜩 날이 서 있었는데 결국엔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무언가가 폭발해 버렸다. 함께 연극을 준비하던 다른 이들과 이견이 있었고, 그 이견들은 점점 가슴속에서 분노를 먹고 몸집을 키우더니 이내 '빵' 터져버렸다.
그날 밤 늦은 시간, 모든 걸 뒤로한 채 청량리역에서 강릉으로 향하는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비둘기호였는지 통일호였는지 기억마저 흐릿한 그 기차는 밤 아홉 시인가 열 시쯤에 청량리를 출발하여 새벽녘에 정동진을 지나 강릉에 도착하는 굉장히 오랜 시간을 달리던 기차였다. 기차에 타기 전부터 청량리역 근처에서 혼자 독작을 하다 기차가 출발한 후에도 옆자리의 다른 이들과 어찌어찌 말을 트게 되어 함께 술을 마시다 강릉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바로 경포대로 직행. 몇 시간을 경포대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안주삼아 깡소주를 마셨던 기억이 있다. 처음엔 이런저런 생각에 마시던 것이 추위를 잊기 위해 마시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30여 년을 훌쩍 건너뛴 지금에도 그날의 기억은 가끔 떠 오른다.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울렁대는 속을 달래기 위해 경포대를 걷다가 어느 순두부 집으로 들어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어떤 이유로 그 길을 떠났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 당시에도 가뜩이나 사람들과의 관계 잇기가 서툴렀던 사람이었는 데다 조그만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던, 꽤나 상처 입기 쉬웠던 사람이었던 듯하다. 게다가 뜬금없는 강릉행을 택했던 그때의 이유도 지금 생각해 보면 대수롭지 않은 그런 것이었을 터. 하지만 그 문제를 붙들고 고민했던 그 시간과 행위가 없었다면, 아니 그때의 시간에 그리 충실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 초빼이의 삶의 무게는 몸무게보다 더 가벼운 사람이 되었을 테니.
결국 며칠을 강릉에서 떠 돌다가 '이젠 돌아갈 때가 되었군'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평소의 삶으로 다시 돌아갔던 것 같다. 물론 몇 마디 쓴소리도 듣고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며 응어리진 감정을 푸는 과정을 거쳐야 했던 건 당연한 수순(이미 응어리진 감정을 풀고 왔는데도 말이다). 그야말로 핸드폰도 삐삐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일시적인 사회적 관계 끊기였었다.
사실 그곳엔 왜, 그리고 어떻게 찾아갔는지도 기억할 순 없지만 초빼이가 그곳을 찾았을 땐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순두부 집을 채우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두 나 같은 사람일까'라는 생각도 잠시 했었던 듯 하다. 낮게 드리운 기와지붕에 꽤 큰 규모의 매장에 사람들이 꽤 많이 들어차 있었던 것에 놀랐던 것 같다. 조용히 들어가 순두부 하나 주문해서 간장 한 스푼씩 올려 깔끔히 해치우고 나왔었다.
30여 년이 흘러 다시 그 집을 찾으니, (사실 꽤 찾기 어려웠다. 주변이 너무 많이 변해서) 그 동네는 초당 순두부 마을이 되어 있었고, 순두부 아이스크림에서부터 젤라토와 짬뽕 순두부 등을 파는 대형 매장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두 번이나 다른 집 주차장으로 들어갔다가 어렵사리 그 집을 찾아갔다.
'강릉시 초당동 원조초당순두부'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 구석에 똬리를 튼 듯 앉아있는 사장님도, 그리고 손님의 입장에 반응하며 다가오는 종업원도 모두 30년만큼 나이가 들어 있었다. 게다가 유일한 손님인 나도 이젠 20대가 아니라 50대가 되었고. 건물은 변함이 없는데 사람만 늙어 있었다.
메뉴를 보니 예전과 조금 다른 구성인듯한 느낌. 예전엔 그냥 하얀 순두부도 주문이 가능했던 것 같은데 이젠 순두부 백반이라는 이름과 순두부 전골이라는 이름의 세트 메뉴로 바뀌었다.
30여 년 만의 방문인데, 천 원이라도 비싼 것을 먹자 싶어 순두부 전골을 주문하니 이내 작은 가스버너가 테이블에 오르고 순두부와 팽이버섯, 당면이 들어간 전골냄비가 올랐다. 작게 잘라낸 모두부 반모와 구수한 향이 일품이었던 비지도 하나. 조금 번잡스러워진 느낌.
초빼이는 콩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콩국수도 먹지 않는 편이다. 콩물을 마시면 입안에서 맴도는 텁텁한 이물감과 식감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기 때문. 게다가 조금 덜 삶은 콩으로 만든 녀석들이라치면 그 특유의 비린내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선호하지 않는데 그나마 콩으로 만든 음식 중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이 두부이다.
전골이 끓기 전 비지에 먼저 손을 얹는다. 사실 두부류 중에서도 초빼이는 비지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 향과 식감이 가장 노골적이고 '날 것'의 느낌을 가지고 있어 그런 듯하다. 다른 재료를 첨가하지 않은 비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고소하다. 두부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가 바로 비지이기 때문인데 콩의 식감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비지는 좋아하는 것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
예전에는 전라도가 고향이신 어머니께서 묵은지나 신김치를 돼지고기와 함께 넣고 끓여주신 비지찌개를 참 좋아했지만 요즘엔 그냥 날 것의 비지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비지에 간장 조금 부어 한 수저 입에 넣으면 그 뿌듯함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그러다 비지를 하얀 밥 위에 올려 함께 뜨면 뜨끈한 밥의 온기에 비지의 향은 더욱 강하게 피어오른다. 비지의 구수함과 부드러움이 하얀 쌀밥의 옅은 단내와 매끄러움에 얹혀 만드는 케미는 아마 한국인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일 듯하다. 그야말로 미식의 정점.
모두부로 손을 옮긴다. 모두부도 젓가락으로 툭 끊어내어 간장에 찍으면 반찬이나 안주로도 손색없을 음식. 게다가 갓 만들어 수분이 빠진 체 나온 두부는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고소한 향과 아주 미세하게 느낄 수 있는 소금맛(간수의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때론 간장도 없이 입으로 넣기도 한다.
모두부와 비지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다 보니 어느새 순두부 전골이 끓어오른다.
고명처럼 올린 고춧가루를 수저로 '휘이' 저어 국물에 푼 후 맛을 보면 이 또한 별미. 뜬금없는 당면의 식감에 잠깐 움찔하긴 했지만 나름 전골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니 감내할 만하다. 조금은 매울 것 같은 외향이지만 그리 자극적이지 않게 순두부의 맛을 잘 살리는 경계를 넘지 않으니 나쁘지 않다.
음식의 기억은 오랜 시간이 흐르며 가슴으로 내려앉아 추억으로 치환되어 보존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머릿속에 떠 오르며 그 음식에 대한 욕망을 불태우게 하는, 그런 과정이 우리가 음식을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초빼이도 기억과 추억의 전환을 거치며 30여 년 전의 추억을 쫓아 찾아오게 만든 것을 보면 음식의 추억이란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굉장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 집의 순두부와 비지도 그 기억과 추억으로 자리를 옮기며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조금은 애틋한 마음도 한 움큼 더해진다.
음식을 주문하기 전 몇 가지 질문에 뚱한 반응을 보이던 사장님께 '30년 전에 이 집을 찾았던 기억을 쫓아 다시 왔습니다. 너무 잘 먹었어요'라고 작별 인사를 하니 그제야 입꼬리가 딱 눈에 보일만큼만 올라간다.
두부처럼 무뚝뚝한 사람인 듯. 아무 감정도 없이 무뚝뚝한 두부 같은 양반인 줄 알았더니 속은 부들부들한 부드러움과 고소함도 품고 있었던 것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다시 이 집을 기억에서 추억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다.
뒤늦은 후회지만 막걸리 한 잔 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다.
[메뉴추천]
1. 방문 시 : 순두부전골 또는 순두부 백반 + 동동주
* 개인의 취향에 의한 추천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님. 적어도 사람 수만큼은 주문해야 도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추가 팁]
1. 강릉 초당순두부 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조초당순두부'로 내비게이션에 검색하면 찾아갈 수 있다.
2. 영업시간은 08:00~16:30까지. 주문 마감은 16:00. 매주 화요일은 휴무.
3. 경포대나 정동진에서 동해바다를 본 후 찾으면 좋다. 차가워진 몸을 데우는데 뜨거운 순두부나 순두부 전골이 제격.
4. 근처에 디저트 가게나 카페도 많이 생겨 식후에도 즐길 수 있는 거리가 있다. 요즘은 순두부 젤라토가 유행인 듯 순두부 젤라토를 파는 가게가 많다.
4. 여행 및 관광정보
- 인근 노포 : 정화식당, 삼교리동치미막국수, 원성식당, 금학칼국수 등이 있다.
- 개인적으로 100대 명산을 돌아다니며 기억에 남았던 길인 '대관령 옛길'도 걸어볼 만하다.
대관령 박물관에서 시작하여 대관령 휴게소(옛)까지 오르는 길이다. 관동별곡을 쓴 송강 정철선생이
다니던 길이기도 하며 신사임당께서 어린 율곡 이이를 마중하던 길이기도 하다. 대관령 옛 휴게소에
오르면 선자령을 가득 메운 풍력발전기(초대형 바람개비)의 웅장함도 볼 수 있다.
- 강릉에서 정동진까지 가는 7번 국도도 드라이브하기에 좋은 길이다. 거친 동해바다의 매력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길
- 오죽헌, 선교장, 경포해변 등도 추천.
- 또한 강릉은 어느새 한국의 커피 본고장이 되어 버렸다. 강릉 안목해변이 강릉에서 유명한 카페거리.
대표적인 곳은 박이추 대표의 보헤미안과 김용덕 대표의 테라로사가 있다.